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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 임솔아

by 수연

기본 / 임솔아



흰 티셔츠를 찾아다녔다.

내일의 약속을 위해서


옷가게에 들어갔다. 흰 티셔츠가 흰 티셔츠끼리

모여 있었다. 가슴에는 주머니가 없거나 있었다.


옆 가게에도 들어갔다. 흰 티셔츠가 다른 티셔츠와

무더기로 쌓여 구겨져 있었다.

구겨진 옷은 조금 더 저렴했다.


얼굴 없는

마네킹은 어떤 옷이든 잘 어울렸다. 내 얼굴에

잘 어울리는 티셔츠를 찾아다녔다.

기본 티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죠, 점원이


말했다. 흰 티셔츠를 찾아다니다 집에 있는

흰 티셔츠가 기억났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집으로 돌아와

옷장 서랍을 열어보았다.

흰 것들을 모두 꺼내보았다.

흰 티셔츠는 저마다 다른 얼룩을 갖고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얼룩마다 치약을 묻혀

비볐다. 지워지고 있는 얼룩을 이목구비가 허옇게 바래가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오래 지켜보았다.


지워지는 얼룩은

지워졌고 지워지지 않는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은

가장 자주 입어 가장 쉽게 얼룩이 졌다.


탈수된 티셔츠를 세탁기에서 꺼내어

탁탁 털었다. 창가에 걸어두었다. 티셔츠가

펄럭였다. 말라가면서 옷은 더 환해졌다. 내 방에는

얼굴 없는 빨래들의 환한 냄새가 퍼져갔다.

내일은 약속이 있다.




《임솔아 시인》

1987년 대전 출생. 2013년『중앙 신인문학상』에 시로, 2015년『문학동네』 대학 소설상을 수상하며 소설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최선의 삶』과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는 기본적인 룰이 있다. 그 룰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나는 항상 무언가에 반항하는 삶을 살아왔다. 조용하고 때론 거칠었으며 때론 정숙하였고 때론 팜므파탈적 일탈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대체로 온순하고 순종적이었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하여 끊임없이 회의하고 시비 분별하고 종 주먹을 들이대었다. 내가 온순한 건 용기가 없거나 착한 사람으로 불리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인의 첫 시집 표제처럼,(『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세상은 괴괴하였고 그 세상에서 나는 착한 사람이고 싶었다. 아니, 어쩜 나는 착함을 빙자한 가장 나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인에겐 내일 “약속이 있다”. 약속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와 만나야 하고 누군가와 대화를 해야 하고, 상대의 기분을 살펴야 하는 등,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세상이 만들어놓은 기본적인 규칙, 예의가 있다. 그 상대가 상사이거나 일적으로 얽혀있어서 내가 그에게 잘 보여야 하거나 그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경우, “기본”은 중요하고 피곤한 일이 된다.


시인은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또는 세상의 규범을 벗어나지 않기 위하여, 오염되지 않은 즉 뻣뻣하고 녹녹지 않은 자아의 숨결을 타지 않은, 순백한 “흰 티셔츠”를 찾아다닌다. (“옷가게에 들어갔다. 흰 티셔츠가 흰 티셔츠끼리 / 모여 있었다. 가슴에는 주머니가 없거나 있었다.”) 가게에 모여 있는 흰 티셔츠들은 한결같이 “가슴에 주머니가 없거나 있었다.” 괴괴한 세상에 맞서서 살아남기 위한 저마다의 방편 혹은 울음주머니가 있거나, 어떤 이는 그 주머니마저 아예 없어서 괴괴한 세상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시인에겐 내일 “약속이 있다”. 그 약속에 최선을 다하기 위하여, “기본”을 지키기 위하여, 내일의 약속에 알맞은 “내일”의 “얼굴에 / 잘 어울리는 티셔츠를 찾아다”니는 시인의 노력은 얼마나 가상하며, 시인은 얼마나 “기본”에 충실한가. “흰 티셔츠를 찾아다니다” 시인은 “집에 있는 / 흰 티셔츠가 기억났다.” “저마다 다른 얼룩을”, 상처를 가지고 있는 티셔츠를 씻는다. 시인에게 가장 근접한 얼굴은 시인에게 가장 근접하여 세상에서 가장 쉽게 상처받고, 가장 쉽게 얼룩이 졌다.


세상에서 자신의 본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처를 자행하거나 오물을 뒤집어쓰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들은 자주 “기본”을 저버리고 자신의 본모습을 애써 감추지 않는다. 감추지 못한다. 그래서 상처투성이, 얼룩 투성이인 자가 곧 시인일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단 하나의 가면도 마련해두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늘 “기본”을 저버린 불온한 자가 된다. 괴괴한 세상에서는 “얼굴 없는 / 마네킹”이 먹이사슬의 최상층에 존재하는 법이다. 이제 “얼룩”을 깨끗이 지운, “얼굴 없는 빨래들의 환한 냄새가 퍼져”간다. 비로소 “기본”을 갖추게 된 시인은 내일 약속을 훌륭하게 또는 무사하게 치러낼 것이다.


얼굴을 말끔히 세탁한, “얼굴 없는” 시인에겐 내일 “약속이 있다”.(홍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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