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힘든 날, 빨간 립스틱을

라이트 에세이 Chapter.3

by 꼬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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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받는 가장 난감한 전화는 생방송 중에 어린이집에서 걸려오는 전화다. 생방송 중이지만 엄마인지라 본능적으로 전화를 받아 보면 역시나
“아이 열이 38도를 넘어서요.” “아이가 토를 해서 기력이 없네요.”라는 선생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다.
당장 달려가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약을 먹여 잘 재워주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내가 아이에게 뛰어간 뒤 나의 자리를 메워 줄 누군가를 구해 놔야만 스튜디오에서 나갈 수 있다. 갑작스러운 생방 부탁에 흔쾌히 응해 줄 동료가 있는가, 없는가. 다행히 나에게는 있었다. 그렇게 동료에게 부탁하고 어린이집에 뛰어가길 몇 차례. 어느 날 나는 누군가로부터
“시도 때도 없이 아이들이 아파서 연차를 쓴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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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이어진 말은 위로조였지만, 어쩐지 ‘시도 때도 없이’라는 말은 내 머릿속에서 쉬이 가시지 않았다. 육아 이슈로 특혜를 누리는 직원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언제는 당연히 이해한다더니… 마음속 섭섭 마귀가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도 했다. 그렇게 지난한 시간을 지나며 어느 순간 내게도 나름의 사회생활 요령이 생겼다. 육아 이슈는 ‘개인적인 이유’로 보고하고(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미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동료들과 평소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만약의 부탁 상황을 대비해), 친한 직원에게는 나의 상황을 솔직하게 나누는 것(긴 설명 없이도 상황 전달이 쉽도록).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효율적으로 일하기’와 ‘필살기 개발하기’였다.

점심시간에도 일하며, 나만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갔다. 다독과 다작으로 실시간 방송에서 DJ에게 시의적절하고 기발한 멘트를 제안하는 것, 많이 듣고 기록해 뒀다가 어떤 사연에도 어울리는 노래가 툭툭 튀어나오는 쥬크박스가 되는 것. 그게 나만의 경쟁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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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목요일만 되면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여자 작가분이 있었다. 목요일은 당시 프로그램에서 가장 일이 많은 날이었다. 하루는 역시나 화장실에서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그분과 마주 쳤다. 전쟁을 나가듯 비장하게 입술을 바르는 그분을 내가 넋을 놓고 보자, 그녀는 말했다.
자기는 제일 힘든 날, 제일 빨갛게 입술을 바른다고.
나를 위한 응원과 격려로.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힘을 낼 수 있도록.

나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터인가 제일 힘들 때 일부러 옷차림에 신경을 쓴다. 바쁘기만 하고 정신없어 보이는 엄마가 아니라, 편하면서도 전문성 있어 보이는, 세련미가 느껴지는 옷을 입는다. 지친 내가 거울 속 싱그럽고 스타일리시한 모습을 보며 힘을 낼 수 있도록. 그러니 워킹맘의 생존법은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육아 이슈를 지나치게 노출하지 말 것. 평소 동료에게 잘할 것. 나만의 필살기를 개발할 것. 그리고 지칠수록 편한 엄마룩 말고 일 잘하는 여성, 세련된 여성의 옷차림으로 나를 격려할 것. 이 정도만 해도 얼추 괜찮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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