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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문어 Jun 15. 2023

돈, 장비, 실력, 3박자 차차차

가난과 건축학도

찢어지게 가난했던 우리 집.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목회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했고, 3살 연상의 어머니는 28살에 그런 아버지와 남은 인생을 함께 하기로 했다.


그때 당시의 자녀계획은 없다시피 한 개념이었다. 1996년 여름, 우리 오빠가 태어났고, 그 후로부터 1년 6개월 뒤, 내가 태어났고, 그 뒤로 또 1년 6개월 뒤, 내 동생이 태어났다. 늘 시끌벅적 웃음과 울음과 괴성이 그치질 않았던 우리 집이다.


아버지가 목사 안수를 받기 전까지는 전도사로 받는 사례비 가지고 다섯식구서 먹고살았다. 아, 목사 안수를 받는다고 해서 형편이 더 나아진다거나 그렇지 않고, 그날그날 다섯식구 굶지 않고 보내면 다행이었고, 우리 엄마는 통장에 100만 원만 있으면 세상 행복을 다 가질 수 있었다.


이런 배경을 가진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건축과 디자인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2016년 2월,

Intel i5에 RAM 8GB, 기억하기론 GTX940 정도의 그래픽카드가 내장된 빨간색 S사 노트북으로 내 건축학도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때 당시엔 건축뿐만 아니라 시각디자인까지 복수전공을 하고 있을 때였으니, 내 노트북엔 오토캐드, 라이노부터 시작해서 어도비 포토샵, 일러스트, 등 타노스가 스톤 모으듯 내 노트북 작업표시줄에는 각종 툴 아이콘들이 하나둘씩 쌓여갔다.


그래도 전공새내기 때는 좀 다행이었다.

모두가 처음이었고, 나는 오히려 툴 배우는 데 있어서는 절대 느리지 않으니 첫 설계 스튜디오 때부터 제도캐드 수업 때 배운 라이노로 3D모델링을 하고, 렌더링 이미지를 뽑고, 포토샵으로 판넬을 만들어 파이널까지 갔다. 두 번째 스튜디오까지도 괜찮았다.


2018년, 세 번째 설계 스튜디오 때부터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놈의 기술이 자꾸 발전하는 것이다.


교수님들은 캐드도 쓸 줄 모르시는데

각종 3D모델링 프로그램과, 렌더링 프로그램들이 건축학도들 앞에 덩그러니 등장했고, 그에 준하는 아웃풋 퀄리티 등 모든 것들이 미친듯한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그렇게 겨우 8기가짜리 RAM을 가진 내 노트북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노트북이 비명을 지를 때마다 과제마감도 늦어지고, 나도 비명을 지르고, 내 학점도 비명을 질렀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던 점은, 다른 친구들은 각종 툴스터디에 참가해서 비용을 지불해서 여러 툴과 스킬들을 익혀와 퍼포먼스를 늘려가는데, 나는 대학에서 가르쳐준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이다. 어떤 것부터 해야 할지도 몰랐다. 내가 못하는 게 뭔지 모르니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내 노트북이 그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2020년, 제삼자의 금전적 도움을 받아 새 노트북을 샀다.

좀 더 나은 CPU, 16기가 RAM, GTX1650...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노트북으로는 모든 걸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내 힘으로 마련한 장비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는 그 감각과, 날로 늘어가는 각종 유료툴스터디들을 통해 스킬을 늘려나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은 계속해서 내 마음을 옥죄었다.


아무 걱정 없이 재료를 사고, 아무 걱정 없이 돈을 투자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부하는 것은 정말 꿈만 같은 일들이었다. 돈이 없으면 건축도 디자인도 어렵다.



시벌 그런데 기술이 또 발전을 했다.


하 이젠 못 참겠다. 차분한 마음으로 그래도 좀 읽을 만한 글을 써서 나와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가 눈물을 또르르 흘리며 조용히 공감버튼만 누를 수 있는 그런 글 써서 발행하면 괜찮겠다 싶어서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는데, 글 쓰는 와중에 또 나랑 비슷한 처지의 촌동네 출신 건축학도와 이야기를 나누어 버렸다.


브런치에 쓰는 글은 내 인스타 계정에 올리는 글과는 좀 다른 느낌을 유지하고, 정제된 글을 쓰려고 했는데, 가난과 건축은 감정을 배제하면 그 맛이 싹 사라지는 것 같다.


무튼 다시 정신 차려서 기술이 또 발전을 했다는 얘기를 다시 시작하자면, 최근 메타버스를 비롯하여 AR과 VR이 건축계에도 들어오기 시작했고, 내가 준비하는 졸업설계에는 VR 혹은 AR을 꼭 접목시켜 전시까지 끝내야 하는 상황이다.


금전적으로 뒤처진 나는 초조한 마음에 어떻게는 발맞춰 나가 보려고 이번학기부터 AR과 VR의 세계에 발을 들여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오토캐드, 라이노, 스케치업, 레빗, 포토샵, 일러스트, 인디자인의 세계를 넘어서 유니티에도 발을 들인 건축학도가 바로 나다. 그리고 유니티로 AR과 VR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C#을 설렵한 초 엘리트 인재가 아닌 이상, 유니티 에셋이 필요하고, 에셋은 유료다. 그것이 싫다면 유니티 리플렉트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쓰면 되는데, 그것 또한 유료다.


사실 어도비 스튜던트 플랜을 제외한 각종 건축 관련 툴들은 대부분 유료고, 가격대가 정말 어마무시하다. 학생 무료버전이 있으면 정말 동서남북으로 엎드려 절 한 번씩 해드리는 것이 기본일만큼 (오토데스크사에 늘 감사함을 전합니다), 가난한 건축학도가 정직하게 툴을 사용하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려면 정말 집안 기둥을 뽑아내거나, 1년에 한 번씩 통장을 채우기 위해 휴학을 하거나, 둘 중 하나다.


기술이 발전했다는 것은 곧, 노트북이 또다시 비명을 지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 나의 조립 PC가 설계실에 도착했다. 제주도에서 5개월, 거지 같은 사장 밑에서 5개월, 인턴 하면서 5개월, 긴 시간 동안 아끼고 아껴 모은 돈에 근로장려금까지 각종 주식과 예금으로 모아뒀던 돈이 살살 녹아 예쁜 케이스를 입은 조립 PC로 현현했다.


3년 전 괜찮았던 나의 노트북 스펙은 어느새 도저히 눈뜨고 봐줄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스펙이 되어버렸다. 도면을 그리고, 모델링을 하고, 렌더 이미지를 만들고, 그걸로 또 각종 패널, 포트폴리오 등 작업을 이어나가다 보면 노트북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뜨거워지고,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 마냥 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때가 된 것이다. 자신의 통장을 녹여서라도, 학자금대출을 받아서라도 다시 장비를 마련해야 할 때가.



가난하다는 것은 단순히 먹고살기 힘들다는 문제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건축을 공부하며 느꼈다. 그만큼 금전적인 문제로 접해보지 못한 수많은 문화와 여러 풍경들이 존재한다. 사소한 것으로 보일진 몰라도 이런 것들이 건축학도가 가져야 할 시선에 큰 자양분이 된다.


건축학도로서 자기를 계발하고, 시야를 넓히는데 필요한 돈건축학도로서 마감을 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여러 스킬들을 단련하기 위한 장비건축학도로서 계속해서 익혀나가야 하는 기술영역들,


이 3박자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건축학도로서의 인생이 길어지거나, 혹은 그 길을 걸어가길 포기하게 되기가 쉬워지는 것 같다. 어느 것 하나도 쉽지 않고, 건축을 향한 애정이 있다면 어떻게든 부여잡고 나아가기야 하겠지만,


요-즘 것들 중 한 사람으로서, 이 3박자가 가끔은 참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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