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삶을, 나를 사랑할 수 있나요?
“가장 멋지고 즐거운 날이란 아주 인상적이거나 놀랍거나 신나는 일이 일어난 하루가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진주를 한 알씩 실에 꿰듯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작은 기쁨이 하나씩 부드럽게 이어진 날이죠.”
순수한 어린 시절로 데려다주는 책, 좋아하는 빨간 머리 앤의 명대사 중 하나다. 하루하루를 진심을 다해 명랑하게 살아가는 앤을 보고 있으면 기운 없고 자신감 부족한 날 용기와 활력을 가져주는 고마운 친구이다. 나도 모르게 미소 짓게 되고 이유 없이 응원하는 마음이 생긴다. 앤이 사람과 삶을 대하는 가치관이 마음에 와닿는다.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겁이 나도 다시 시도하는 모습, 자연에 감탄하며 바람에 실려 온 계절의 향기를 깊이 음미하는 모습은 몇 살이 되든 닮고 싶다. 앤이 울 때면 같이 울고 웃으며 따듯한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 변화하는 풍경을 알아보는 앤에게 삶은 어떤 하루도 같지 않다. 매일 만나는 사람이 같아 보여도 새로운 점을 발견한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과정 자체를 즐기는 모습을 보며 잘 해내지 못할까 봐 두려울 때도 피하지 않고 부딪치며 겪어가는 방식을 배웠다.
삶이 때론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깊은 외로움과 불안, 과거의 상처들이 떠오를 때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삶을 사랑할 수 있을까? 성인이 되고 스스로 삶을 책임져야 할 시기가 어김없이 찾아왔다. 어른만 되면 뭐든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이 있었지만, 어린 시절 꿈이 날이 갈수록 멀어지는 듯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지내왔지만, 끊임없는 방황과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 가족들이 실망할까 봐 두렵고 불안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강에도 적신호가 들어왔다. 만성 후두염과 성대결절로 고립된 생활이 이어졌고 경제활동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연인에게는 마음이 식었다는 말을 듣고 헤어지게 되었다. 매일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길고 긴 터널 안에 갇힌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한 걸음씩 내디뎠다. 이 시기의 나에게 가장 미안했던 건 몸이 아프고 버림받은 나를 위로해 주기보다 나조차도 쓸모없다고 스스로 비난했던 행동이었다. 삶을 사랑하기 이전에 ‘그럼에도 이런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때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길고 긴 터널 저 멀리 작은 빛이 스며들어왔다. 나에게 해대던 비난을 거두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이지만 살아있음에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다시금 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앤은 물었다. “그럼에도 삶을,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나요?” 나의 대답은 언제나 ‘그렇다’이다. 아파도 다시 경험할 기회를 얻는다면 또 그렇게 하고 싶다. 몇 번이고 말이다. 터널 끝엔 빛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조금씩 삶이 보여주는 풍경과 표정들이 다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꺼져가던 불씨가 살아나듯 이루고 싶었던 꿈도 고개를 내밀었다. 매일 비슷해 보이는 검은 밤하늘에 어느 날은 별똥별을 보게 되는 우연한 만남 같은 그런 순간이 선물처럼 찾아오기도 한다. 이 순간을 작은 기적의 순간이라고 부른다. 물론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웃는 날뿐만 아니라 아픔 등 온갖 희로애락의 경험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모든 순간들이 삶 속에 반짝이는 보석 같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