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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Dec 28. 2023

포장 없는 재능, 준비 없는 재능

어릴 때 나는 외모 지하주의자였다. '내면이 중요하지 외모나 외형은 중요하지 않다. 깊은 철학, 삶의 의미 이런 것들이 중요한 반면 외모는 일종의 포장이라 위선적인 부분이 많다'라는 생각.


최근 파멜라 앤더슨의 노 메이크업에 대해 동료 배우 제이미 리 커티스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패션위크의 한 가운데서 수많은 압박 등을 견뎌야 하는 파멜라 앤더슨이 얼굴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채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나는 이런 용기와 반항의 행위에 매우 감명을 받았고 놀랐다"라고 했으며, 스페인의 배우이자 TV 프로 진행자인 소냐 페레르는 생방송 도중 화장을 지우며, 여성들이 젊어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누드비치도 있는 걸 보면 확실히 꾸미지 않는 것, 남을 의식하지 않는 행동은 자유를 선사한다. 그렇다고 일상에서 발가벗고 다니면 당연히 경찰서에 잡혀갈 것이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다. 꾸미는 게, 포장이 싫다고 축의금이나 조의금을 봉투 없이 꾸깃한 지폐로 주면 받는 사람이 기분 좋을 리 없다. 아무리 허물없는 가족 사이라도 집안에서 늘 런닝과 팬티 차림으로 지내면 좋아할 상대방 역시 별로 없을 듯하다. 


며칠 전 OO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면서 2024년 상반기 도서관에서 개최하는 강의 프로그램에 강사로 지원해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문의했다. 담당자는 공식적인 지원 절차는 따로 없다면서 어떤 강의인지 상세하게 물어오셨다. 나는 대략 10분간 다소 장황하게 설명을 했고, 담당자는 내부 회의 때 논의를 해보겠다는 답변을 주셨다. 도서관을 나오면서 '아차! 최근에 새로 만든 명함을 주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났지만, 폐관 시간이라 다시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조금 더 체계적이고 명료하게 내 강의의 목적과 내용을 설명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나와 내 강의를 홍보할 수 있는 브로슈어가 있으면 참 좋겠구나 싶었다.


다음날, 아직 브로슈어 만들 단계는 아닌 것 같아 일단 1장짜리 PDF 파일로 강의 소개문을 만들었다. 이걸 출력해 놓았다가 강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에 방문할 때마다 데스크에 전달하고 오려 한다.


최근 독학으로 공부해 건축가로 대성한 안도 다다오의 책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읽었다. 역시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하여 작곡가의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나인지라 무언가 배울 점이 있을 것 같아 고른 책이다.



스물여덟 살 시절, 가진 것 없이 설계사무소를 열 때부터 '일감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손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p.217)



안도 다다오는 누가 의뢰하지 않아도 그 땅에 무언가를 짓고 싶으면 일단 설계도를 그렸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설계도를 그려놓은 곳에 실제로 건축을 의뢰하는 거짓말 같은 일도 생겼다. 


역시나 안도 다다오처럼 '내가 강사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이미 강사인 것처럼 나와 내 강의 소개문을 항상 휴대하고 다녀야겠다. 그리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내 소개를 할 수 있도록 간략하고 명료하게 설명하는 연습을 충분히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엊그제 도서관 담당자가 상세히 물어볼 때처럼 기회가 왔을 때 어영부영해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포장도 일종의 준비다. 내가 수강생의 입장일 때, 시종일관 똑같은 디자인 포맷으로 내용만 바꿔치기한 PPT로 진행한 강의가 너무 지겨웠고, 성의 없이 느껴졌다. 간밤에 술이 덜 깬 용모로 PPT 없이 그동안의 경력만 믿고, 대충 말로 얼버무리는 강사도 너무 싫었다. 강의를 듣는다는 것은 이미 귀중한 내 시간을 내어준 행위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내가 CM송을 만들어 준 친구는 매우 깐깐한 사업가다. 내가 하도 직업을 자주 바꾸니까 2018년경인가 처음 곡을 만든다고 그 친구한테 얘기했을 때도 속으로 '또 무슨 뻘짓을 벌이나'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친구가 이번에 내게 곡을 의뢰해서 무척 뜻밖이었다. 물론 무료라 그랬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자기 회사의 제품 홍보에 쓰일 곡이니 단지 돈이 안 든다는 이유로 내게 부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직 입봉을 못한 작곡가 아닌 작린이라서 그 친구에게 작곡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면 당연히 의뢰도 없었을 것이고, 나는 상업적인 CM송을 만들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완성된 곡에 친구는 만족을 했고, 나는 포트폴리오가 남았으니 둘 다 남는 장사를 했다. 내가 친구한테 '요즘 작곡한다'라는 사실을 알린 자체도 일종의 포장이고, 준비다.


좀 더 체계적인 포장이라면 내 이력과 포트폴리오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웹페이지를 만들어서 언제든 원하는 사람에게 SNS로 링크를 보낼 수 있게 준비해 두는 것이다(뮤지션을 위한 강의에서 배움). 또 인터넷에 서툰 사람을 위해 종이 문서로 출력해서 소지하고 다닐 수도 있다.


최근에 아들이 원해서 차(car)를 바꿔줬는데, 내가 올 수리를 해서 준 것과 달리 아들이 준(타던) 차는 앞 유리도 금이 가 있고, 심지어 운전석 발판에 먼지도 그대로인 걸 보고 제법 서운했다. '역시 자식한테 기대하면 안 되겠구나'하고. 


재능에 있어서도 사소한 포장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강의 프로그램을 짜는 담당자는 나의 사소한 준비물이나 말투, 배려에서 나를 강사로서 적격인지 부적격인지 판단할 수 있다. 대단한 가수 이승철도 매번 자기 앞에 선택을 바라는 수백 곡이 도착해 있는데, 지금껏 주로 신인 작곡가의 곡을 선택했다고 한다. 신인이라고 감히 대가수 이승철에게 곡 보낼 엄두도 안내는 사람과 신인이긴 하지만 최대한 성의껏 곡을 만들어서 간략한 소개와 함께 곡을 보낸 사람 중 누가 행운을 거머쥘 가능성이 높을까.


우리는 준비도 철저히 하지 않고, 포장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남들이 내 재능을 못 알아본다고 한숨 쉬고, 한탄한다. 남들은 보통 나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저절로 내 재능을 알아보겠는가. 열심히 나를 포장하고 홍보해도 관심을 가질까 말까 한데 말이다.


포장은 일종의 배려다. 상대방이 애쓰지 않아도 쉽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에 열정과 경험과 재능이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게 예쁜 포장지로 포장하는 것이다.


외모에 관심이 없는 것에서 지나쳐 외모를 경멸하기까지 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반성한다. 외모는 내면과 함께 가는 동반자다.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내려는 성형은 부작용이 많고 사기는 범죄이지만, 있는 것을 상대에게 예의를 갖춰 전달하려는 포장은 재능의 씨앗을 세상을 뿌리는 데 꼭 필요한 태도이다.


옷차림이 단정하고 패션 감각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빨래하기 귀찮다고 어둡고 칙칙한 색의 옷만 입는 사람은 때로 그 사람 자체마저 그렇게 보인다. 포장의 또 다른 장점은 예쁘게 포장하려다 보면 내용물(내면)까지 더 다듬게 된다는 사실이다.


강의를 위해서 PPT를 준비하다 보면 완성도 있는 PPT를 위해 자료를 더 찾게 되고 공부하게 되면서 그 분야에 한발 더 전문가가 된다.


지금의 재능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부족하더라도 그 상태에서 일단 예쁘게 포장을 해 보자. 부족한 재능도 필요한 곳이 있고 그곳에 알리기 위해서는 포장이 필요하다. 포장이 을이고, 내용물이 갑이 아니다. 포장과 내용물은 동반자 관계다. 포장으로 구찌 가방을 선택했다면, 가방에 최소한 1000원짜리 지폐를 넣어둘 수는 없지 않을까.



나의 재능을 세상에 알리고, 쑥쑥 자라나 더 큰 재능이 되도록 키우기 위해서 부지런히 포장하고, 또 그 포장에 걸맞게 내 재능을 단련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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