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펜을 선물 받으면
항상 '이것은'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며 그림을 그리는 아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전철문이에요... 이것은 전철문이고, 이것은 문간에 서 있는 사람이에요."
아이는 아저씨를 그립니다.
‘잘생겼지만 아주 잘생긴 건 아닌’ 이 아저씨는
머리에 피아노도 이고 갈 수 있을 것처럼 힘이 세게 생겼는데,
손에 조그만 봉지 하나만 달랑 들고 있습니다.
대체 뭐가 들었을까요?
아이의 손끝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요.
'이것은'은 한 세계의 문을 여는 말입니다.
'이것은'은 신비한 세계의 문을 여는 말입니다.
그 문은 텃밭에서도 열립니다.
이것은 별꽃입니다.
꽃 지름이 3밀리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작은 꽃은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조그맣고 하얗게 빛납니다. 그래서 이런 이름이 붙었대요.
밭에서 누구보다 빨리 자리를 잡고 꽃까지 피웠네요.
이제 곧 밭을 덮으며 채소 자리를 침범할 예정입니다.
밭주인이 바지런을 떨면 뽑아버릴 테고 어쩌면 너그럽게 봐줄지도 모르겠습니다.
듣기로는 꽤나 산만하다니, 이 작고 예쁜 잡초의 운명이 어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네요.
별꽃이 봄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습니다.
빨리 들어가세요! 시간의 문은 금방 닫히니까요.
이것은 민들레입니다.
햇볕 아래 노란 꽃이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나물로도 먹는다지요.
흰민들레가 약이 된다길래 작년에 공들여 밭에다 심었는데 하나도 싹이 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텃밭 사잇길에서 흰민들레 여러 송이가 느긋하게 흔들리며 활짝 피었더라고요.
"나는 야생이다!" 외치면서 말이죠.
이것은 뽀리뱅이입니다.
저는 생전 처음 들어본 이름입니다.
텃밭 귀퉁이에서 파릇파릇하게 자라고 있길래 혹시 냉이일까 궁금해서 검색해 봤어요.
냉이랑 구분이 잘 되지 않는데
냉이는 흰꽃이 뽀리뱅이는 노란 꽃이 핀대요.
저는 뽀리뱅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만,
꽃이 필 때까지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
냉이처럼 이것도 나물로 먹는다고 하네요.
이것은 질경이입니다.
텃밭은 질경이 천지예요.
이랑과 고랑을 덮고 텃밭 사잇길들도 덮습니다.
밟아도 밟아도 끄떡없어요.
이름이 '질기다'라는 느낌을 주는데 실제로 어디서나 질기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말이죠, 질경이도 봄에 파릇하게 싹을 내밀 때 나물로 해 먹으면 맛있다네요.
이것은 개망초입니다.
뽀리뱅이를 찾아보다가 이 풀이 개망초란 것도 알게 됐습니다.
달걀꽃이라고 하는 작은 꽃을 피우는 그 풀이 바로 이 풀이예요.
색이 아주 진하고 깨끗하네요. 역시 나물로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심은 건 하나도 없네요. 명색이 텃밭인데요. 설마 제가 하나도 안 심었기야 했겠어요^^
이것은 달래파입니다.
달래향이 좋아서 인터넷으로 달래를 구매했는데 파가 왔지 뭡니까.
달래파는 달래의 별칭인 줄 알았어요.
달래는 달래고 달래파는 파의 일종이래요.
달래향이 나고 매운맛이 살짝 나는 파라고 하니 달래 먹는 기분은 나겠습니다.
작년 늦가을에 심었는데 겨울을 (기적적으로) 이겨내고 이렇게 시름시름 나오고 있습니다.
다른 밭에서 월동한 파들이 하도 힘차게 자라서 기분이 우울하네요.
과연 잘 자라줄까요?
'살짝' 매운맛과 달래향을 즐기게 해 줄까요?
이것은 부추입니다.
효자 중에 효자입니다. 겨울을 넘겨 이 봄에도 잎을 키우고 있네요.
작년에 모종을 사다 심고 자라는 것만 보고 별로 뜯어먹지는 않았습니다.
부추꽃만 실컷 감상했네요.
마트에서 부추 한 단을 들고 살지 말지 고민하다가 우리 밭에 부추가 있다는 걸 뒤늦게 떠올리곤 했습니다.
올해는 잊지 않고 부추전도 해 먹고 무쳐도 먹어야겠어요.
이것은 애플민트입니다.
엄청나요. 바람이 살짝 불거나 하다못해 옷깃만 스쳐도 향기를 확 풍깁니다.
엄청난 건, 생존력 얘기기도 해요.
겨우내 바싹 말라서, 죽었나 보다 했는데 이렇게 작디작은 잎들을 동그랗게 내밀고 있습니다.
올해도 향기를 마음껏 뿜어줬으면 좋겠어요. 백이면 백, 그럴 겁니다.
이것은 삽과 쇠스랑입니다.
삽과 쇠스랑을 집어든 사람들은 마음을 들킨 겁니다. 그리움과 외로움을 말이죠.
흙 속에 자기들이 찾는 게 들어있기라도 한 것처럼 흙을 파고 들추고 헤집습니다.
막연한 향수를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들은 어쩐지 사람 냄새가 납니다.
이 좁은 5평, 10평, 20평 밭에 찾아와서 흙을 파게 만드는 바로 그것 말입니다.
여러분도 외롭고 그리울 때, 주말농장에 들러 따뜻한 위로처럼 걸려있는 삽과 쇠스랑을 가만히 만져보세요.
봄볕에 따뜻해진 삽과 쇠스랑은 더 친절할 거예요.
이것은 퇴비입니다.
'퇴비'로 자유연상을 해보겠습니다. 고자리파리, 진딧물, 굼벵이, 선충... 아아아악! 못하겠어요!
퇴비에 '낭만' 같은 낭만적 단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요. 그 대신 (유사) 과학적 단어들은 있습니다.
이를테면, 오줌을 넣어서 만든 천연 액비라든지, 생물적 방제, 직파, 흩뿌림 같은 전문용어들이요.
'똥내'도 여기에 포함시켜야 할지 말지 좀 고민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넌… 넌… 작년의 그 인간?
두해살이였니? 흉물…
방금 전의 비명은 미니멀한 내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것이겠지?
좋은 말 할 때 흙 덮어라!
이번주의 텃밭 기록을 합니다:
3월 21일 : 루꼴라와 적환무 씨를 뿌렸다.
3월 24일 : 조선파 씨를 뿌렸다. 호박, 오이, 애플수박 지지대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