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좀 보셨어요?
작년, 늦가을로 접어들며 텃밭의 왕성하던 채소들이 시들어 뽑히고, 그 자리에 김장용 배추와 무가 자라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것들은 거의 미친 듯이 자라고 있었어요. 너무 크고 시퍼래서 무섭기까지 하더군요. 배추잎사귀는 진초록 한복치마처럼 펄럭였고, 무는 크다 못해 자빠질 듯 땅 위로 쑥 올라와 있었죠. 우리 텃밭과 근처 초보 텃밭에서만 배추가 한 줄, 무가 한 줄, 부실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초보 텃밭 주인은 나와 비슷한 또래신데, 배추와 무를 대하는 태도는 놀랍도록 비슷했어요. "뭐, 잘 안 되면 김장은 절임배추로 하면 되죠. 히히." 여름에 상추를 뜯어서 꽃다발처럼 품에 한아름 안고 갈 때부터 알아봤어요.)
이웃 텃밭 아저씨가 내 텃밭의 배추를 죽 보더니 이러시대요.
- 김장 배추는 사서 하실라고요?
- 아니요. 저걸로 할 건데요.
아저씨는 보일 듯 말 듯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요런 배추는 쌈을 싸 먹으면 맛있다고 요렇게 저렇게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그랬죠. '잘 키워서 보란 듯이 김장을 담글 테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 부실한 배추들로 김장을 담그는 데 성공했습니다. 20킬로는 족히 됐을 거예요. 이름처럼 배추 속이 샛노랬던 내 소중한 '황금배추들'은 끝까지 성실하게 달려서 다른 배추들을 거의 따라잡았거든요. 다섯 포기가 그랬단 얘기죠. 나머지는 쌈 싸 먹기 딱 좋았을 크기였어요. 하지만 나는 시든 잎사귀까지 다 모아 모아서 김장을 담갔습니다. 한 잎 한 잎이 정말 귀중했어요. 젓갈로 살짝 힘을 주면 배추가 작든 크든, 시들었든 싱싱하든, 대충 다 맛있어져요.
그때로부터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서, 김장 배추와 무의 시대가 오기 전, 토마토의 시대가 끝나갈 때쯤, 아저씨와 밭에서 조우한 또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저씨가 느닷없이 저희 밭으로 건너오시더니 다정하게 물으셨어요.
- 재미 좀 보셨어요?
- (재미? 재미라... 무슨 재미를 말하는 걸까... )
'재미를 보다'는 표현에 대해 내가 너무 편견이 있구나, 뉘우치며 나는 곧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며 대답을 했지요. 토마토도 망치고 오이도 안 달리고 호박은 몇 개 따먹지도 못했다고요. 겸양이라기보다는 사실을 얘기한 거네요. 어쨌거나, 재미를 못 봤다는 뜻이었죠. 그리고 아저씨의 토마토를 칭찬해 드렸어요. 아저씨의 토마토들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큰 토마토는 큰 토마토대로, 방울토마토는 방울토마토대로, 어쩜 그리도 동글동글 반짝반짝 풍성하게 매달리는지 볼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아저씨는 칭찬을 듣고 조금도 겸손하지 않았어요. "뭘요, 잘 되기는요." 하고 말하기는커녕 실컷 토마토 자랑을 하시더군요. 재미를 왕창 봤다는 뜻이었죠.
시간을 또 거슬러 올라가서, 토마토의 시대가 오기 전, 막 텃밭을 시작해서 이런저런 모종을 심고 각종 씨를 뿌려놓고는 사랑에 겨운 눈으로 흙을 들여다보던 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저씨가 내 옆으로 슬쩍 오시더니 물으셨어요.
- 재미있어요?
- (아이구 참... )
뭐라 대답할 말도 없고 해서 그냥 웃었습니다.
남편과 나는 아저씨를 우등생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끼리 부르는 별명이에요. 작년 3월, 주말농장 관리실에서 지정받은 밭을 갔다가 옆의 아저씨 텃밭을 보고 우리는 감탄을 했습니다. 각이 딱 잡힌 깔끔한 밭이었어요. 마늘인지 파인지 양파인지, 왕겨로 두툼하게 덮어놓은 모양새가 보통이 아니었어요. 프로구나! 그래서 마침내 밭 주인공을 만났을 때는 반갑고 황송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제 이 분한테 많이 배워야지, 나는 운도 좋아, 생각하면서요.
올해도 아저씨의 텃밭은 근사합니다. 작년처럼 마늘인지 파인지 양파인지는 심지 않았고, 대신 월동 시금치가 새파랗게 자라고 있습니다. (작년 늦가을에 씨를 뿌려서 겨울을 나고 봄에 먹는 월동 시금치는 아주 맛이 좋다고 하네요.) 아주 예쁘게 키우셨어요. 겸손하지 않은 아저씨를 나는 절대 미워하지 않습니다. 아저씨는 눈곱만큼도 밉상이 아니에요. 오히려 식물들을 정성으로 키우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사랑하는 모습을 보는 건 기분 좋은 일입니다. 진심으로, 올해도 아저씨가 우등을 했으면 좋겠어요.
얼마 전, 마침내 3월이 왔고, 관리실 아저씨가 나오셨으려나 기대하면서 밭구경을 나갔더니 횅했습니다. 아무도 없었어요. 일주일이 지난 두 번째 일요일, 다시 찾은 주말농장에는, 웬걸,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더군요. 그날, 벼르고 벼르던 퇴비를 뿌렸습니다. 작년에는 관리실에서 파는 미완숙 퇴비를 뿌렸더니 냄새가 보통 역한 게 아니었어요. 게다가 벌레!!! 미완숙 퇴비 속에는 벌레 알들이 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작년 내내 밭에서 본 온갖 벌레들이 다 그 퇴비 때문이라고 원망하면서, 기필코 올해는 완숙 퇴비를 뿌리리라, 결심했더랬습니다. (벌레에 대해서는 한두 줄로 끝날 얘기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완숙 퇴비를 애지중지, 한 톨이라도 흘릴라, 소중히 쓸어 담아가며 밭이랑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일곱 줄입니다. 이랑 앞에서 올해의 다짐을 했습니다:
1. 욕심부리지 않는다.
2. 욕심부리지 않는다.
3. 욕심부리지 않는다.
작년에는 온갖 걸 다 심어보고 싶어서 별별 식물들을 심다가 대부분은 '재미'를 못 봤고 일부는 감당 못할 정도로 자라서 버리기도 많이 했습니다. 상추와 쑥갓은 모종을 큰 판으로 하나씩 사서 심었다가 식겁했어요. 먹느라고요. 그걸로 이불속을 채웠다면 몇 채는 거뜬히 만들었을 겁니다.
이번주의 텃밭 기록을 합니다:
3월 10일 : 밭을 일궜다.
3월 17일 : 감자(설봉감자)를 한 이랑, 강낭콩(얼룩강낭콩 & 빨강강낭콩)을 한 이랑 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