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리,
세상에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가 있어왔어. 이야기들은 저마다 주인공이 있는데 대개는 주인공이 어려움을 겪지. 주인공이 그 어려움을 어떻게 맞이하고 통과하는가를 보여주는 게 유일한 목적인가 싶을 정도로 거의 모든 이야기는 주인공의 어려움에 집중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작자도, 이야기를 읽거나 듣거나 보는 독자도 모두 여기에 관심을 쏟아.
스웨덴의 작가 린드그렌이 쓴 <미오, 나의 미오>에도 위험한 모험을 떠난 아홉 살 남자아이가 나와. 미오라고 하는 이 주인공은 세상을 위협하는 사악한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서 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서 낯선 숲과 길을 헤매고, 검은 호수를 건너고, 높은 바위 절벽을 기어올라야 했지. 악당의 부하들은 사방에 돌아다니고 있는데 미오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들은 너무 적었어. 미오가 상대해야 할 악당은 너무나 사악했고, 행복하고 안전한 집은 너무 멀리 있었지. 미오는 자주 절망했어. 숲이 이렇게까지 어둡지 않으면 좋을 텐데, 길이 이렇게까지 길고 컴컴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악당이 이렇게까지 사악하지 않았다면 좋을 텐데, 집에서 이렇게까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면 좋을 텐데. 미오는 자신이 너무나도 작고 외롭다고 느꼈어.
<어스름 나라에서>에도 미오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아이가 나와. 아이의 이름은 예란. 예란은 다리가 아파 일 년째 침대에 누워있어. 그리고 어느 날, 어쩌면 예란이 다시는 못 걷게 될 것 같다고 엄마가 아빠에게 말하는 소리를 엿듣게 되지.
"아무래도 예란은 다시는 못 걷게 될 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는 차라리 안 듣는 게 좋았을 걸 그랬어요.
예란은 미오와 똑같은 생각을 한 거야. 숲이 이렇게까지 어둡지 않으면 좋을 텐데. 그 얘기는 차라리 듣지 않았더라면 좋을 텐데.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예란도 미오처럼 느꼈을 거야.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작고 외롭다는 기분이 들진 않을 텐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방은 벌써 아주 캄캄했지만 예란은 불을 켜고 싶지 않았어. 자신이 정말로 다시는 못 걷게 되는 걸까를 골똘히 생각하며 지난 생일에 선물로 받은 낚싯대를 영영 못 쓰겠구나 싶어서 예란은 조금 울었지. 바로 그날이었어. 특별한 일이 일어난 건. 자신이 걷지 못할 거란 얘길 들은 바로 그날, 어스름이 내리는 시각에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게 아니겠어. 도대체 누가 3층의 창문을 두드릴 수 있을까?
창문으로 들어온 건 바둑판무늬 외투를 입고 높고 까만 모자를 쓴 아주 작은 남자였지. 창문은 닫혀 있었는데. 남자는 자기를 어스름 나라의 백합 줄기 아저씨라고 소개하면서 예란에게 물었어. "나는 이 도시를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창문을 기웃거리지. 어스름 나라에 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말이야. 혹시 너, 가고 싶지 않니?" 예란이 자기는 다리가 아파서 아무 데도 갈 수 없다고 말하자 아저씨가 다가와 예란의 손을 잡으며 말했어.
"괜찮아. 어스름 나라에서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
두 사람은 푸르스름한 어스름에 싸인 도시 위를 날아올랐어. 교회 첨탑을 지나고 공원 나무에도 잠깐 내려앉았어.
어스름 나라의 왕, 허깨비 나라의 왕이 사는 궁전에 들어가 왕과 왕비도 만났어.
어스름 나라에서는 사슴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아기 곰들이 주스를 뿌리며 장난을 쳐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어. 예란은 옛날 옷을 입은 소녀와 춤까지 췄어. 어스름 나라는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까! 예란은 어스름 나라를 여행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오기 전에 백합 줄기 아저씨의 작고 아름다운 집도 방문했지. 고요한 백합의 집이라는 아주 예쁜 이름의 집을.
"내일 어스름 녘에 다시 만나자." 백합 줄기 아저씨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저씨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어요. 바로 그때 엄마가 들어와서 불을 켰어요.
그날부터 백합 줄기 아저씨는 날마다 예란을 찾아왔어. 둘은 매일 어스름 나라로 떠났지. 어스름 나라는 아주 신기하고 멋진 곳이어서 예란은 기분이 정말 좋았어. 다리가 아파도 괜찮아. 예린은 날 수 있으니까. 어스름 나라는 어떤 곳일까? 린드그렌 작가는 어떤 얘기를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걸까?
작가는 슬쩍 힌트를 줘. 어스름 나라는 허깨비 나라라고 말이야. 상상으로 창조한 세상이란 얘기지. 낮이 밤으로 바뀌면서 단단한 현실이 잠시 느슨해질 때, 태양빛이 스러지면서 모든 형상의 경계가 희미해질 때, 세상이 잠시 멈춘 것처럼 느껴질 때, 환상의 세계가 슬쩍 끼어드는 거야. 그 시간의 틈으로. 그래서 모두가 현실로부터 잠시 풀려나는 거지. 자유를 누려. 옛날이야기 속 왕과 왕비가 시간으로부터 풀려나고, 사슴도 아기 곰들도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다리가 아파 걷지 못하는 예란도 날 수 있게.
예란은 백합 줄기 아저씨를 처음 만난 날, 전차를 운전하기도 했는데 전차에는 아이들이 타고 있었어. 아이들 중에는 예란이 아프기 전, 학교에 다닐 때 같은 반이었던 여자 아이도 있었어. 옛날에도 항상 상냥했는데 그날도 그 아이는 여전히 상냥했지. 마냥 행복해 보인 그 아이도 실은 그렇지 않았는지 백합 줄기 아저씨 말로는 '어스름 나라에 온 지 꽤 오래' 되었다는구나.
예란과 미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별자리를 떠올렸어. 린드그렌의 판타지는 마치 별자리처럼 작고 외로운 마음들을 이어주는 것 같아. 작은 별 하나가 다른 별과 이어지고 또 다른 별과 이어져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별자리. 사람들이 작은 곰, 큰 곰, 황소, 전갈, 염소, 물병을 그려내는 상상의 세계. 하늘 가득 펼쳐지는 풍성한 이야기의 세계.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세계. 하늘이 캄캄할수록 더 밝게 빛나는 별자리의 세계.
너무 행복하면 백합 줄기 아저씨의 창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짬이 없겠지. 오로지 슬프고 외로운 사람만이 백합 줄기 아저씨의 어스름 나라를 꿈꿀 거야. 작고 외로운 사람이 나 말고 또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조금 위로가 되지 않을까? 혼자가 아니니까, 그리고 작고 외로운 사람이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위로해 주려는 사람이 있으니까. 예란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이 마음 따뜻한 작가가 슬퍼하는 아이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며 이렇게 얘기하는 듯 느껴져. 괜찮아.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아. 어스름 나라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넌 괜찮을 거야. 아무 문제가 없을 거야.
* 연재글의 제목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전기의 한국어 번역서 제목을 빌렸습니다: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 옌스 안데르센 지음, 김경희 옮김, 창비, 2020. (원서의 원래 제목은 이 하루, 한 생입니다.)
** 인용한 그림들은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