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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E Oct 01. 2022

버거 페데레이션
Burger Federation

해외편

여행에는 찰나의 중독성이 있다. 휴가를 제출하는 순간, 공항에서 비행기 티켓을 받는 순간, 비행기 창문으로 도착지가 햇살 아래 빛나는 순간, 열차 창문으로 터널이 끝나고 풍경이 드러나는 순간, 처음으로 파도 위에 올라서서 바다 위에서 육지를 바라보는 그 순간, 낯선 도시의 공기에서 갓 구운 빵 냄새가 나는 순간, 이국적인 것에서 익숙한 무언가를 느꼈을 때의 순간.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을 꼽자면 공항 카운터에서 비행기 티켓을 건네받을 때다. 대부분의 거래가 디지털로만 이루어지고 디지털 화폐까지 나온 마당에, 여전히 두꺼운 종이에 투박한 인쇄체 글씨로 적힌 그 티켓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절취선을 따라 접기도, 그대로 들고 다니기에도 애매한 크기의 종이를 여권 사이에 끼워 검색대를 통과하고 나면, 뇌가 여행자 모드로 재부팅된다. 


정확히 그 시점부터 나는 휴대폰의 모든 알림을 무시한다. 동시에 아무런 근심도, 후회도, 미련도 없는 상태가 된다. 지금 나는 이 도시와 티켓에 적힌 도시 사이의 어딘가를 떠도는 중이다. 실제로 하필 미국 공항에 있을 때 고국이 전복되어 여권의 효력이 정지되면서 JFK 공항 밖을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도 있다.(영화 터미널이 이 실화를 다룬다.) 


혼자 여행을 할 때면 공항에 조금 일찍 가곤 한다. 비행기 출발시간에 맞춰서 방문을 나서기까지 기다리기도 힘들거니와 공항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행인을 관찰하는 시간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특히 아침 비행기를 탈 때가 재미가 있다. 직원들은 풀어헤쳐진 머리를 묶으며 카운터를 향해 달려가고, 청소차는 바닥을 색칠하느라 바쁘다. 쇼핑몰의 셔터가 서서히 올라가는 데가 있는가 하면 아직 불이 꺼진 곳도 있다. 방금 켜진 커피머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진한 커피 향을 풍긴다. 일찍 일어났으니 피곤할 만 도한데 그 시간의 공항에 있으면 신체의 모든 감각들이 날카로워지는 느낌이다. 평소의 내 능력을 초월한 감각이랄까.


그리곤 버거 가게를 찾는다. 공항은 버거를 먹기에 최적화된 장소다. 시간을 절대 어기면 안 되는 공항의 업무 특성상 빨리 만들어져야 하고, 장시간 비행에 해로울 수 있는 과식은 금물이다. 게다가 공항은 그 어느 곳보다 혼자인 것이 자연스러운 장소다. 


아, 인천공항은 예외다. 버거라곤 롯데리아뿐이고(버거킹은 지하철역에 있어 멀다), 그 마저도 게이트를 통과한 후엔 없다. 2022년, 공항 길안내를 로봇이 하는 시대에 겨우 롯데리아라니.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버거 요정에게 최고의 공항은 미국이다. 미국 공항의 안내 스크린에는 보통 식당 외에 ‘Burger’라는 버튼이  따로 있다. 뉴욕, LA, 샌프란시스코, 마이애미, 라스베이거스 등 모든 공항에 최소 네 개 이상의 버거 전문점이 있다. 수십 개에 달하는 미국 내 국제공항 간에 최고의 버거를 가리는 기사도 흔히 볼 수 있다. 도착한 도시의 공항에서 이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면, 일상에서 가장 멀리 있는 장소인 공항이 나의 일상으로 들어온다. 동시에 낯선 도시에서 어딘가 익숙함을 느끼고 좀 더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


공항에서 먹었던 수많은 버거 중에 딱 하나를 고르라면 떠오르는 가게가 있다. 동생을 만나러 런던으로 가는 여정이었는데, 도하의 하마르 공항에서 꽤 긴 시간을 체류하게 됐다. 유럽으로 가는 가장 싼 항공권은 으레 중동을 거치므로 익숙한 코스였다. 


자정 직전에 비행기를 탔으나 한국시각으로 한밤중인 그 시각에도 하마르 공항의 면세점은 여전히 성업 중이었다. 중동의 대부분의 공항 면세점은 24시간 영업을 한다. 하지만 식당도 그럴지는 자신이 없었다. 예상대로 대부분의 식당이 불이 꺼진 가운데 은은한 조명과 화려한 간판이 눈에 띄었다. 간판이 따로 없었지만 긴 테이블에 다리가 길고 등받이가 낮은 의자가 길게 서있는 걸 보고 버거 가게임을 직감했다.


‘The Buger Federation’이라고 써놓은 입간판을 확인하고는 신이 나서 가게 안을 두리번거렸다. 빨간 조명등과 빨간 의자가 강렬하다. 무언가 식물을 심어놓은 알루미늄 화분이 천장에 종대로 매달려 있고, 그 아래 화려한 핀포인트 조명이 춤을 춘다.


부푼 기대감을 안고 입간판 옆의 메뉴판으로 다가간 순간 가게 이름에 ‘Federation’이라는 단어가 붙은 이유를 알았다. 총 12개의 버거 메뉴에 전부 나라 이름이 들어갔다. 프렌치 커넥션, BLT USA 버거, 잉글리쉬 에그 버거 등등. 바하 램 버거 같은 특이한 버거도 있다. 영국으로 가는 길이니 잉글리쉬 에그 버거를 주문할까 하다가 프렌치 커넥션을 주문했다. 노른자가 터져 흘러내리기라도 하면 상당히 귀찮은 일이다.


버거는 코팅된 나무 트레이에 올려져서 나왔는데 이번에도 버거를 보자마자 왜 이름에 ‘프렌치’가 붙었는지 깨달았다. 패티 아래에 감자칩이 깔려 있다. 한쪽으론 무언가 하얀 것이 튀어나와 마치 버거가 혀를 내민듯한 모양새다. 크고 높은 버거를 위에서 누르니 거품 낀 고깃기름이 살짝 흘러나왔고, 동시에 흐를 듯이 침이 고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패티는 뜨겁고 부드럽다. 하지만 그 두꺼운 패티보다도 치즈 위에 올려진 다른 고기가 훨씬 더 인상적이다. 규동에 올라가는 소고기 같은 맛과 식감인데 프랑스 사람들이 이렇게 고기를 좋아했나 싶을 만큼 듬뿍 들었다. 튀어나온 무언가 하얀 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브리치즈였다. 패티 아래에 깔린 감자칩에 이어 놀라움의 연속이다. 이에 달라붙은 브리치즈의 껍데기에서 희미한 버터향이 느껴진다. 곰팡이 치즈 특유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아마도 자른 지 제법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향이 날아간 상태이리라.


다른 야채는 들어있지 않다. 고기와 치즈뿐이다. 하지만 메뉴를 개발한 사람의 영리함이 느껴졌다. 브리 치즈 한 조각으로 진짜 프랑스에서 밥을 먹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다른 메뉴가 궁금해 미칠 지경인데 이미 배가 부르다. 막 기름통에서 건져낸 것처럼 채에 담겨 나온 감자는 아직 손도 대지 않았다. 이럴 때는 대식가들이 너무 부럽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런던으로 가는 연결 편에 올랐다. 혹시나 하고 런던 히드로 공항을 뒤져봤지만 버거 페데레이션이라는 가게는 없었다. 


버거 페데레이션을 다시 보게 된 곳은 전혀 뜻밖의 장소였다. 런던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동생을 만나 쉴 새 없이 미식 여행을 한 나는 프랑스로 갔다. 파리에서 기차로 네 시간 거리인 그레노블이라는 작은 시골마을에 있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아직 겨울의 흔적이 남아있는 알프스 산자락 아래의 마을에서, 친구와 나는 인근의 수도원과 고성을 거닐며 술과 게임에 빠져 며칠을 보냈다. 


그레노블을 떠나기 전 날, 우리는 차를 몰아 인근의 대도시인 리옹으로 갔다. 가는 길에 주유소에 한번 들렀는데, 거기에 서 눈을 의심케 하는 간판을 발견했다. The Burger Federation. 

운명이었을까. 나는 지금 내가 어딘지도 몰랐다. 그레노블에서 리옹으로 가는 고속도로 어딘가의 휴게소다. 우리는 친구의 와이프가 해준 따뜻한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섰지만, 가게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빨간색과 검은색의 강렬한 대비가 도하에서와 똑같다.


친구는 프렌치 커넥션, 나는 BLT USA 버거를 주문했다. 온갖 야채가 다 들어가 거대해진 버거는 먹기는 불편했지만 훌륭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생각나는 건 역시 브리치즈가 들어간 프렌치 커넥션이다. 


“야. 이거 소고기가 한국에서 먹은 불고기 같은데?”


프렌치 커넥션을 먹은 친구가 말했다. 같은 버거를 먹었는데 한국인인 나는 프랑스가 떠오르고, 프랑스인인 친구는 한국이 떠오른다니 재미있다.


버거 페데레이션은 종잡을 수 없는 가게다.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이 가게의 정체를 알기 위해 구글링을 해봤지만 홈페이지 하나 나오지 않았다. 혹시 12개의 버거 메뉴가 있는 국가에는 지점이 하나씩 있나 싶어 12개의 나라에서 모두 찾아봤지만 영국, 스페인, 독일, 스위스에는 아예 없었다. 메뉴판에서 읽을 수 있는 감각과 인테리어로 보아 미국의 체인점 같긴 한데 미국에서도 그리 흔하진 않다. 그 후로 몇 년간 여행을 다니며 발견한 곳은 미국의 시카고 공항과 로마 공항이다. 이민을 간 친구 말로는 캐나다 토론토 공항에도 있다고 한다. 


나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아직 못 먹어본 버거가 10개나 있다. 맛있는 버거 가게는 많지만, 모든 메뉴를 다 먹어보고 싶은 곳은 버거 페데레이션이 처음이다. 언젠가는 12개 나라의 모든 공항에서 버거 페데레이션을 먹을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이 글을 읽고 버거 페데레이션을 찾은 독자 여러분의 뜨거운 후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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