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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E Sep 25. 2022

파이브 가이즈
Five Guys

해외편

이쯤에서 나의 신체 능력 한 가지를 고백하겠다. 음식과 관련이 있다. 나는 매운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매운 것을 먹으면 구레나룻, 이마, 겨드랑이에서 동시에 땀이 나면서 마치 알코올을 섭취한 것처럼 얼굴이 붉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뇌는 매운 음식 이름을 듣기만 해도 마치 먹은 것처럼 이 현상을 정확히 재현할 수 있다. 마치 종소리만 울려도 침을 질질 흘리는 파블로브의 개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 매운 음식은 신라면이 한계치다. 


이런 능력(?)은 종종 약점이 되는데, 여자 친구는 본인이 뭔가 마음이 들지 않을 때면 "떡볶이! 아귀찜! 매운탕!" 같은 단어를 외치곤 한다. 그럴 때면 곧바로 캡사이신이 닿은 것처럼 혀가 움찔움찔하고, 잠시 후 관자놀이부터 땀이 맺힌다. 먹지도 않았는데 땀만 나니 여간 억울한 게 아니다. 아뿔싸. 위에 그 음식들을 쓰면서 뇌리에 매운탕의 빨간 양념이 스쳤고, 동시에 그 능력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방금 씻고 나왔는데, 벌써 관자놀이 아래가 뜨겁고 축축해진 것이 느껴진다.


이런 능력이 발동되는 상황이 하나가 더 있다. 그건 바로 땅콩 냄새가 날 때다. 정확히는 땅콩에 고기 냄새가 섞인, 특정 땅콩기름 냄새에 반응한다. 매운맛처럼 여러 가지 신체 특성이 나타나진 않고, 단지 입에 침이 고이면서 갑자기 허기를 느낀다. 마치 뇌에서 "빨리 저 냄새나는 것을 먹어치워!"하고 명령하는 느낌이랄까.


어렸을 때부터 매운 음식을 먹으면 반응이 왔던 것과 달리, 땅콩 능력(?)은 30대에 생겼다. 정확히 이 가게를 다녀온 뒤부터 생겼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미국의 버거 전문점 파이브 가이즈다. 이름에서부터 창업자가 5명인 느낌이 풍겼는데 실제로 그렇다. 맥도날드가 형제로부터 시작되었다면 파이브 가이즈는 아버지와 네 아들의 공동창업이다. 1986년 버지니아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지금은 미국 전역에 수백 개의 매장을 거느린 대형 체인점이다.


파이브 가이즈도 첫 회사의 미국 출장 때 처음 경험했다. 일요일이면 주로 차를 몰아 교외의 쇼핑몰을 휘젓고 다녔는데, 나 같은 사람에게 미국의 쇼핑몰은 천국이다. 미국은 대부분의 푸드코드에 적어도 5개 이상의 버거 전문점이 있는데, 뉴저지의 웨스트필드 쇼핑몰도 마찬가지였다. 그중에 빨간 간판에 하얀색으로 쓴 'Five Guys'라는 글씨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흰 벽에 빨간색으로 포인트를 준 내부 인테리어도 훌륭하다.


문을 열고 가게 안에 들어서자마자 무언가 고소한 냄새가 가득 났다. 패티 굽는 냄새는 아니다. 지방이 타는 냄새와 달리 무언가 고소한 냄새다. 카운터 뒤 메뉴판에는 'All TOPPINGS FREE'라고 커다랗게 쓰여있다. 그 아래 나열된 토핑의 종류는 마요네즈, 양상추, 피클, 토마토, 구운 양파, 구운 버섯, 그린페퍼... 대충 세어봐도 족히 서른 가지는 되어 보이는데 이게 다 공짜라니. 아니 애초에 빵 사이에 다 들어갈 런지나 모르겠다. 하지만 미천한 영어 실력으로 하나하나 고르다 보면 등에서 식은땀이 날게 뻔하니 그냥 다 넣어달라고 주문했다. 물론 감자와 콜라도 함께였다.


주문을 하고 이 고소한 냄새의 근원을 찾아 두리번거리니, 오른쪽 창가 아래에 하얀 쌀 포대 같은 자루가 잔뜩 쌓여있는 게 눈에 띈다. 가까이서 보니 땅콩 포대다. 파이브 가이즈는 패티를 굽고 감자를 튀기는데 전부 땅콩기름을 쓴다. 고소하고 짭짤한 땅콩 냄새가 패티를 굽는 냄새와 섞여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자꾸만 침샘을 자극한다. 


포대 옆에는 사람 한 명은 거뜬히 들어갈 만한 거대한 마대 자루에 땅콩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손삽과 종이 트레이도 같이 비치되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공짜였다. 팁을 15%나 내는 나라에서 공짜라니 신선한 충격이다. 나는 땅콩 한 움큼을 들고 자리에 돌아와 하나씩 까기 시작했는데 그 맛이 기가 막힌다. 땅콩도 땅콩이지만, 마지막에 땅콩을 만진 손에 뭍은 가루를 쪽쪽 핥아먹는 것이 하이라이트다. 정작 버거를 받았을 때는 이미 어느 정도 배가 채워진 상태였다. 


저 많은 토핑이 빵 사이에 다 들어갈까 싶던 우려도 현실이었다. 은박지에 쌓인 버거를 꺼내고 보니 망치로 두드린 듯 여기저기 찌그러져 있다. 온갖 재료와 소스가 범벅이 되어 대체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아보기 힘든 지경에 한입에 넣기도 힘들었다. 입에 들어가는 쪽을 누르면 반대쪽으로 재료가 쏟아진다. 어렵게 어렵게 한입 가득 입에 넣으니, 그 많은 재료 속에서도 두툼한 패티의 존재가 뚜렷하다. 그리고 땅콩 냄새, 미국 특유의 꼬릿 한 체다치즈 냄새와 섞인 땅콩 냄새. 온갖 소스가 짬뽕이 되었지만 후각이 맛을 지배해 맛있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꾸덕하고 무겁다. 목이 마른 맛이다. 양이 너무 많아서 종이백에 담겨 나온 감자는 먹지도 못했다. 이러고도 버거 하나에 겨우 6달러라니 비현실적이다.


첫 경험의 실패를 교훈 삼아 두 번째 방문 때는 미리 공부를 하고 갔다. "All the way"라고 주문하면, 수십 가지 토핑 재료 중에 일반적인 버거에 쓰이는 재료들만 들어간다. 감자는 주문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땅콩을 먹었다. 결론적으로 "All the way"가 훨씬 더 맛있었다. 빵 모양이 덜 무너졌고, 크기도 적당히 컸다. 마요네즈 소스가 땅콩기름과 정말 잘 어울린다. 구운 버섯과 양파, 다른 야채의 식감도 훨씬 좋아졌다. 그렇게 뇌 안에 땅콩기름 냄새를 새겨 넣는 데는 단 두 번의 방문으로 충분했다. 그 이후로 나는 파이브 가이즈라는 단어를 듣거나 간판을 보면, 입에 침이 고이면서 허기가 느껴진다. 지금도 그렇다.  


어느새 파이브 가이즈는 유럽까지 진출해 글로벌 체인이 되었고, 한국에서는 쉑쉑, 인 앤 아웃과 함께 미국 3대 버거로 불린다. 그중에서도 유독 쉑쉑과 자주 비교되는데, 이를 의식한 건지 몇 년 전부터 파이브 가이즈에서도 셰이크를 팔기 시작했다.

버거 요정의 입장을 표명하자면, 파이브 가이즈의 승리다. 양이 푸짐해서 파이브 가이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파이브 가이즈의 땅콩 냄새는 마약과도 같아서 한번 맛보면 끊기 힘들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하얀 포대자루가 주는 인상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코로나 직전에 갔던 런던의 파이브 가이즈 매장에 땅콩 포대가 없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도 나는 미국으로 여행을 가면 도착하자마자 파이브 가이즈가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찾는다. 슈퍼 두퍼가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파스타 같은 느낌이라면 파이브 가이즈의 버거는 엄마가 해준 푸짐한 집밥 느낌이다. 엄마가 늘 그렇듯 자식에게 넘치도록 주고 싶어 하지 않는가. 다만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어서 사양하게 된다. 어른이 되면 될수록 그렇다. 서로가 보고 싶어 만났으면서도 정작 그 얼굴 앞에서는 내내 투덜거리다가 헤어지고 나서는 나의 못남에 잠을 설친다. 


하지만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내 밥상에는 엄마 반찬이 올라오고, 그걸 먹으며 만회라도 해보겠다는 듯 엄마에게 문자를 보낸다. 한 일이 년 내에 다시 같은 일이 순서도 안 바뀌고 일어날 것이다. 그 사실에 늘 안도한다. 매일 보면 본채도 하지 않거나 싸우기 일수지만, 가끔 보면 뭉클해지는. 


그러니 내가 파이브 가이즈의 땅콩 냄새에 반응하는 것은 단순히 맛있는 것에 대한 욕구만은 아니다. 잊고 있던 무언가를 환기하는 느낌이랄까. 맞아 그게 중요한 건데 잊고 있었어. 왜 그걸 모르고 있었지. 왜 잊고 살았지. 나는 멈춰 서서 그 중요한 것에 관해 생각할 필요가 있어. 그래서 미국이든 유럽이든, 파이브 가이즈만은 배가 불러도 들어간다. 음료만이라도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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