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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E Sep 22. 2022

미라클 오브 사이언스
Miracle of Science

해외편

제목만 보면 갑자기 웬 과학 타령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문과들은 안심하시라. 과학얘기는 아니다. 이과생들에게는 약간은 흥미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미라클 오브 사이언스는 미국 보스턴에 있는 버거 가게 이름이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내가 가본 버거 가게 중에 가장 충격적이고 힙하다. 얼마나 충격적이냐 하면, '버거 요정의 버거 일기'라는 쓸데없는 내용만 잔뜩 있을 법한 책에서 'Science'라는 제목의 챕터를 발견한 것만큼 충격적이다.


보스턴에 간 건 아직 첫 직장을 다닐 때다. 뉴스에서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나와 4G의 시대가 오고 있다며, 그때가 되면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가능할 것처럼 전 세계가 호들갑을 떨던 그즈음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엔 아직 LTE가 없었기 때문에, LTE 폰을 만들던 우리 부서는 통째로 미국으로 출장을 갔다. 당시 LTE는 그 넓은 미국에서도 딱 한 군데에서만 사용 가능했는데, 세계의 석학들이 모두 모여있다는 보스턴이었다. 


12월, 겨울의 보스턴은 듣던 것보다 훨씬 더 혹독했다. 나는 보스턴에서 40일 정도 머물렀는데 그중에 눈이 오지 않은 날은 10일 정도다. 적설량도 엄청나다. 미국이 흔히 그렇듯 당시 머물던 메리어트 호텔도 지하주차장이 없었는데, 자고 일어나면 온 호텔 직원들과 투숙객들이 모여 눈에 파묻힌 차를 파내야 했다. 손이 제일 먼저 닫는 창문을 파내고, 강제로 문을 열어 시동을 건다. 자동차의 진동으로 바퀴가 윤곽을 드러내면 그 사이를 삽으로 다시 파낸다. 하지만 앞유리의 얼어붙은 눈은 만만치가 않다. 부서지는 눈을 다 치워도 와이퍼와 유리가 한 몸이 된 채로 꽁꽁 얼어붙었다. 언제 다시 눈이 올지 모르는 보스턴의 겨울에 와이퍼 없이 운전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그렇다고 앞유리에 밀착된 얼음을 망치로 두드려 깰 수도 없으니, 그때 즈음 호텔에서 끓인 물을 양동이로 퍼 나른다. 셔츠에 넥타이 차림의 사람들이 양동이에 든 뜨거운 물을 뿌리고 재빨리 운전석에 올라타 와이퍼를 움직이는 모습이 일사불란하다. 마치 고대 유물 발굴 현장 같다. 


그마저도 아침에 눈이 오지 않아야 가능했고, 그렇지 않은 날은 보스턴의 거의 모든 회사가 문을 닫았다. 나 역시 40일의 절반 정도는 호텔에 갇혀 있었는데, 그럴 때는 호텔 앞 4차선 도로가 눈으로 막혀 건너편에 있는 서브웨이에 걸어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분명 간판에 불이 켜져 있었는데, 서브웨이 직원은 대체 어떻게 출근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새해를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주말, 눈이 그친 것을 확인한 나는 부지런히 발굴작업을 했다. 크리스마스 때부터 거의 2주 동안 호텔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기에 마음이 급했다. 마침내 차에 시동을 걸고는 찰스강으로 향했다. 찰스강을 가로지르는 하버드 브리지를 지나면 MIT 공대가 먼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5분 정도만 더 가면 하버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12월의 하버드는 휑했다. 하버드 대학교의 도서관에 불이 꺼진 적 없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겨울 방학을 맞은 하버드 대학교는 쥐새끼 한 마리 없이 황량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천재들은 다시 고향을 찾아 전 세계로 흩어졌다. 거의 모든 건물에 자물쇠가 굳게 걸려있고, 도서관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설립자 존 하버드 동상의 왼쪽 구두(만지면 3대 안에 하버드 입학생이 나온다는 속설이 있다)를 만져보기 위해 동상 주변으로 수북이 쌓인 눈을 한참 동안 파내야 했다.


사정은 하버드 스퀘어도 마찬가지였다. '세 개의 스트리트로 이루어진 삼각형 모양의 광장은 쇼핑, 음식, 서점 등 다양한 볼거리가 많아 하버드 투어의 핵심 관광지'라고 책에 적혀있었지만 문을 연 가게는 드물었다. 하버드 로그가 박힌 후드도 살 수 없다. 다행히 Mr. Bartley's는 문을 열었다. 천만다행이다.


하버드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 중 하나인 Bartleys’s의 내부는 텍사스 bbq를 팔 거 같은 모습이지만 버거 전문점이다. 겨울방학의 일요일에도 사람들이 앉아 있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이 가게에서 가장 유명한 건 메뉴판인데, 유명인사들의 이름을 땄다. 오바마가 대학시절 즐겨먹었던 조합을 메뉴로 만들어 'Obama burger'라고 파는 식이다. 미국 대통령, CEO, 영화배우들이 메뉴판에 가득이다 보니 너무 길고 고르기가 힘들다. 오바마를 고를까 하다가 hot and spicy라고 적힌 글자를 보고 결국 빌 클린턴을 골랐는데,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그 아래에 있는 힐러리 버거의 설명에 아래와 같이 써진 것을 나중에 발견했다.


"그의 취향은 괴상하다."


아무래도 마케팅의 성공인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가게를 빠져나와 MIT로 향했다. MIT 캠퍼스는 상황이 좀 나았다. 대학 캠퍼스와 외부가 구분이 없는 구조라 여기저기 가게들도 많았다. 이 겨울에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다니는가 하면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헐크가 찌그러트린 것처럼 생긴 희한한 건물들 아래를 걷다가 1층 건물의 가게 하나가 눈에 띄었다. 깨끗하게 잘 관리된 유리 벽을 보아 식당 같았는데 캐노피 천막의 글자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Miracle of Science


뭘 파는 가게 인지도 몰랐지만 뺨을 벨듯한 칼바람에 등을 떠밀려 가게로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나무문을 열자 열기를 머금은 촉촉한 공기가 뺨에 부딪힌다. 창가에 비치는 캐노피 아래로 이른 저녁의 잔광이 들어온다. 반들반들하게 닦인 참나무 바닥이 그 빛을 둔탁하게 반사한다. 정면에는 거대한 보틀 렉이 있는 바가 보였다. 금발의 아가씨가 하얀 헝겊을 사용해 익숙한 솜씨로 컵을 닦아 낸다. 오른쪽 벽에는 커다란 칠판이 붙어 있고 알 수 없는 알파벳들이 적혀있다. 바텐더 뒤의 보틀 렉을 치우면 시골 마을의 작은 분교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냥 술집인가 싶어 메뉴를 달라고 하니 컵을 닦던 금발의 여성이 손가락으로 오른쪽 벽을 가리킨다. 가게에 들어설 때부터 궁금하긴 했다. 대체 벽에 칠판을 왜 붙여놓은 건지. 자세히 보니 알 수 없는 알파벳들은 일정한 규칙이 있다. 대문자 하나와 숫자 하나 또는 대문자 하나와 소문자 하나. 주기율표다. 가운데 빈 공간에는 별 모양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미드 빅뱅이론에서 본 기억이 있다. 양자역학에서 사용하는 심벌이던가. 



그 주기율표가 메뉴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카메라를 든 손이 떨릴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예컨대 'Qc'는 'Chicken quesadilla' 고, 'Hp'는 'Hummus plate' 플레이트다. 후무스와 케사디아가 뭔지 당시엔 몰랐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b'가 버거다. 


"Rb with a B please"


예상대로 'B'는 'Beer' 다. 'Rb'는 뭐냐고? 'Ronie Burger' 다. 'Ronie'가 뭐냐고? 가게 직원 이름이란다. 물은 H2O를 달라고 해야 될까? 세상에. 어느새 나는 MIT에 다니는 너드가 되어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힙해도 되는 건가? 힙함이 선을 아득히 넘어 치사량이다. 누군가 같이 간 사람이 있었더라면 그대로 바에 앉아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부어라 마셔라 했을지도 모른다.


이 가게도 가본 지가 10년이 넘었다. 하지만 홈페이지가 아직 건재해 안심하며 넣기로 했다. 물론 버거의 맛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Mr. Bartley's를 실패로 기억한 것을 보면 맛있었던 모양이다. 2011년 당시에 썼던 페이스북을 찾아보니 하얀 접시에 윗 빵이 살짝 분리된 버거와 감자, 야채가 같이 담겨 나왔다. 치즈에는 할라피뇨가 들어있어 살짝 매콤한 맛이 났다. 감자는 튀기지 않고 구웠는데, 상당히 촉촉하고 시즈닝이 훌륭하다. 대학가 식당이라 가격도 저렴하다.


미라클 오브 사이언스는 흔히 갈 수 있는 버거 전문점과 너무 달라서 좋았다. 그 특유의 분위기가 2022년의 힙플레이스에도 뒤지지 않는다. 거의 반대말에 가까운 'Miracle'과 'Science'를 붙여놓은 것처럼, MIT앞에 이렇게 힙한 가게가 있으리라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지금도 보스턴 하면 여기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가이드 북에도 나오지 않는 이런 장소를 찾아내 구글 지도에 저장할 때의 그 기분이란. 폭설로 인한 오랜 고립과 야근으로 지친 삶에 기적 같은 빛과 소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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