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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Mar 21. 2024

<눈부신 안부>를 읽고

   

읽는 동안 너무 좋으면 리뷰 쓰기는 자연스레 미뤄진다. 내가 아는 근사한 언어를 동원해도 책이 준 기쁨을 표현하기엔 부족하니 말이다. 이 책이 그랬다. 아, 너무 좋다. 이 한마디로 충분한 소설. 그럼에도 뭔가 끄적거려 보자면...     


모든 것이 이상하리만치 무의미한 나날들. 좋아하는 커피도 에세이도 시큰둥해져서 삶의 즐거움이라곤 하나도 없는 볼품없는 매일이 이어졌다. 기쁨과 슬픔, 서운함과 즐거움, 어느 감정 하나 힘을 쓰지 못하고 그저 편평한 기분 속에 매몰되던 그때, 불쑥 소설이 읽고 싶었다. 무척이나 재미있는 것으로. 그 동굴에 푹 파묻히면 잊었던 감정의 볼륨이 되살아날 것 같았다. 그때 이 책을 만났다. 잔잔하지만 명확한 감정들을 글로 읽으며 일상의 주파수를 다시 맞췄다. 안전하고 아름다운 방법으로.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슬픔에서 회복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306  

    

책 속에 애관극장, 대한서림, 신포시장이 나와서 반가웠고 배경이 된 독일의 이국적인 느낌도 좋았다. 주인공이 천근호를 찾는 과정에서 알게 된 ‘현기영 작가’의 신춘문예 당선 소감은 신선해서 놀랍고 루이제 린저에게 갖고 있는 우리의 오해(?)를 보며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을까?’ 290 라는 문장이 새삼 다가왔다. 반점을 사용해 비교적 긴 호흡으로 쓰지만 어디 하나 걸리는 것이 없는 문장에선 수없이 다듬었을 작가의 눈길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섬세하고 다정한, 어떤 상황과 인물을 표현하든 무척 조심하는 글의 태도, 백수린 작가가 더 좋아졌다.      


나를 위해 너의 편지를 전해준 아이들의 마음이 나를 며칠 더 살 수 있게 했듯이,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304     
그 아이들과 있을 때면 나는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나라에서 이주해 온 이방인도, 언니를 사고로 잃은 아이도 아니었으니까. 그곳에서 나는 그저 온전한 나였고, 레나는 온전한 레나였으며, 우리는 온전한 우리였다. 그런 시간은 이모가 시장에서 떨이로 사 온 무른 산딸기나 살구로 만들어주던 잼처럼 은은하고 달콤해서, 나는 너무 큰 행복은 옅은 슬픔과 닮았다는 걸 배웠다.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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