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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고리들의 축제

by 도라

대학생 시절 흥미롭게 들었던 교양 수업을 기억한다. 어학연수에서 돌아와서 깊은 우울의 늪에 빠져 학교도 제대로 나가지 않던 시절이었다. 결국 학사경고 엔딩을 맞고 찻집에서 부모님과 마주 앉아 내 인생의 문제점들을 돌아봐야 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지만, 그 사이에서도 기억에 남은 수업이 있다.


단출한 기억력을 가진 나는 대부분 정확한 내용을 기억하기보다 그 막연한 흐름만을 기억하는 식이다. 현대 사회에서 아주 불리하고 비효율적인 기억 방식이라는 것은 차치하고 흐름을 주축으로 한 기억에 상상력을 가미해 수업을 설명해 보자. 시작은 일단 묘비가 있는 어느 사진부터다.


단풍이 지고 낙엽이 떨어지는 딱 지금과 같은 계절에 회갈색 초라한 묘비가 있다. 가을의 쓸쓸함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 정도로 쓰인 모양새였다. 그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수업의 다음 스텝으로 교수님께서 굳이 그 묘비에 적힌 인물을 찾아보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수업은 이런 식이었다. 우연히 보게 된 그 사진 속의 묘비에 적힌 인물을 찾아보고, 그 인물이 태어난 장소를 찾아보고, 그 장소의 유명한 음식을 알게 되고, 그 음식의 유래를 찾다가 식당을 찾고, 그 식당을 자주 찾은 유명인사를 찾고, 그의 책을 알게 되고, 그 책의 이론을 주축으로 다른 학자들을 찾고, 그 학자들이 묻힌 묘비의 위치를 찾아보고, 그 장소에 대해 또 찾고..


단순한 단서, 끝없이 이어지는 작은 고리들을 타고 가서 큰 의식 없이 장르를 넘나들고 여러 국가와 인물들을 거쳐간다. 결국 작은 고리는 확장되고 순환한다. 교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이 준비한 ppt를 보여주며 학생들에게도 같은 과제를 내주었다. 수업명도 교수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 수업을 사랑했다.


그런 단순한 고리들을 사랑한다. 고리들을 통해 주어지는 순간들을 사랑한다. 무작정 구하기 시작함에서 얻어지는 우연한 마주침의 환희들, 그런 것들을 사랑한다. 단순한 고리들은 대책 없이 튀는 공 같은 내 삶에서 거의 유일하고 희미한 가이드로, 매 순간 무의미의 축제를 벌인다.


국화를 예로 들어본다. 국화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다. 남편은 연애 시절 특별한 날마다 내게 국화를 선물했다. 나는 그에게 국화차를 대접했다. 국화는 일본어로는 키쿠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국화 국자에 꽃 화자를 붙여서 쓰지만 일본어에서는 꽃 화를 떼고 국화 국(菊) 한 글자만을 쓴다. 국화 국의 일본어 발음이 '키쿠'다. 여성 이름에 쓰이곤 한다는데, 국희의 국자 역시 국화 국 자였을까 생각해 본다.


국화가 일본어로 키쿠라는 것을 알려준 사람은 어학연수 시절 만났던 일본 남자애였다. 나와 같은 대학생이었고 오사카에서 활동하는 밴드가 있었고 그의 포지션은 드럼이었다. 그가 추천해 준 곡이 소닉 유스의 Drungken Butterfly였다. 숨 가쁜 보컬이 달리는,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기타 사운드의 이 곡은 내게 20대 초반을 그 노이즈 속에서 숨 쉬게 만들었다.


다음 연결고리의 바턴은 Butterfly가 이어받았다. 멜론에 들어가서 Butterfly를 검색한 다음 나오는 모든 곡들을 가능한 만큼 들어본다. 마음에 드는 몇 곡을 추려서 내 플레이리스트에 담는다. 그렇게 자미로콰이의 Butterfly는 20대 중반에 가장 사랑했던 곡 중에 하나로 남았고, 코린 베일리 래의 Butterfly도 그랬다. 지금의 남편인 남자친구를 만나면서는 내숭을 떨고 싶었던 건지, 실제로 부드러운 곡들이 필요했던 건지 그 역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즈음 그녀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의 여성 보컬 곡들을 많이 찾아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코린 베일리 래의 플레이리스트는 노라존스가 대체했고, 노라존스와 주드로가 연인으로 나오는 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도 찾아보았고, 영화 속 엘리자베스라는 인물은 내 삶에 대한 방향을 조정했다. 당연하게도 영화를 본 뒤 주드로에 빠졌고, AI, 클로저, 리플리 같은 영화를 찾아보았고, 90년대 감성에 빠져 세렌디피티 같은 영화를 다시 찾아보고 급기야 크리스마스 시즌에 유행 지난 알록달록한 색 전구를 충동적으로 구입하기도 했다.


90년대 영화 중 [인생은 아름다워]는 인생 영화가 되었다. 그 의미는 수년째 변하지 않는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를 '인생은 아름다워'로 유지하는 것으로 남겨두었으며,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닉네임을 여주인공 '도라'로 정하면서 못 박았다. 성의 이니셜 G를 따다 뒤에 붙여 뜻밖의 도라지가 돼버리긴 했지만 지금도 나는 이 이름을 사랑한다. 귀도역을 맡은 로베르토 베니니의 익살스러움과 무한한 듯 보이는 긍정 에너지, 그 에너지를 통해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택하는 도라. 유대인이 아님에도 남편과 아들을 따라 함께 수용소로 향한 강인한 도라. 그런 도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도 사랑하고 싶기 때문에.


도라까지 오는 경로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여러 갈래들이 존재했다. 그 갈래와 고리들은 연약하고 무의미해 보여서 당시에는 어떤 선택이든 불안했을지라도 때때로 의미심장한 이정표나 생각지도 못한 도착지로 삶을 이끌었다. 그런 보잘것없는 지푸라기 같은 선택과 그를 위한 시간의 소비가 나라는 한 명의 인간을 잡아끌어 나름의 삶을 살도록 했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은 순간이나 자잘한 의미 없는 습관 따위를 구태여 타인에게 내어놓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것들이 삶을 경제적으로 이끄는 요소들은 아닐지라도, 감히 필수적인 항목들이라고 느낀다.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과 같이 지나치기 쉬운 삶의 틈을 찾아 들여다보고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세상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의 편에 서있다. 다시 한번 아들의 말을 말을 떠올려본다.


'그러니까 잘하고 싶지 않으면 잘하고 싶어 져.'


그러니까 의미를 두지 않으면 의미가 생긴다. 무의미가 모이면 유의미가 된다. 일상이라는 망망대해에서는 무의미라는 그물망을 던져야만 건져낼 수 있는 의미들이 있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기필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 작은 고리들이 이루어내는 축제 속에서. 찬란한 무의미의 축제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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