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레 들이닥친 겨울에 옷장을 열어보니 옷들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올초에 옷장 정리를 하면서 '좀 깨끗하게 입고 다니자!'는 호기로운 생각으로 보풀이 계속 돋아나는 옷들, 따뜻하지만 맵시가 좋지 않아 손이 잘 가지 않던 옷들을 모두 버렸던 기억이 났다. 부랴부랴 주문했던 옷들은 주문 폭주로 인해 열흘 뒤에나 배송된다며 죄송하다는 문자로 홀드 되어서 이것저것 껴입고 다녀보는 요즘이다. '내 보는 눈이 아직은 트렌디한가 보군.'이라는 말로 정신승리하기에는 날이 너무 춥다.
인생에 있어서도 비로소 가을에 접어들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생각이다. 소식이 뜸하던 이들에게서 들려오던 결혼식과 청첩장의 소식들이 장례식과 부고장으로 대체되고 있다. 나의 인생도 무언가 열매를 맺는 듯하면서, 낙엽을 떨구는 풍성하고도 슬픈 계절, 가을로 접어든 것이다. 왁지지껄한 여름에 비해 무시무시한 겨울에 비해 조용해 보이지만, 가을은 그렇게도 모순적이다. 결실과 낙하. 그 두 가지는 그토록 밀접해 있다. 하룻밤을 기점으로 카디건에서 패딩으로 뒤집히는 요즘처럼.
재작년 가을에는 친할머니의 장례식과 여동생의 결혼식이 일주일차로 치러졌다. 지난주에는 검은 옷을 입고 울고, 다음 주에는 화사한 옷을 입고 웃었다. 결혼식은 예정되어 있었으나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오기에 그 두 가지를 우리는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좀처럼 만나기 어렵던 얼굴들이 모여 어머니였던 할머니였던 고인을 추억하고, 조그만 아이였던 신부를 추억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못 본 세월들이 무색했다. 핏줄은 낡지 않았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지방에 있는 나의 고향에서 열렸다. 외할아버지는 태어나기 전 돌아가셨고, 20대에 친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친할머니는 내게 마지막 조부모님이셨다. 근무 중에 부고를 듣고선 남편과 부랴부랴 짐을 챙겨 고향으로 향했다. 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처음으로 염하는 것을 보았다. 예쁘게 정돈된 할머니의 굳은 얼굴에서, 막 태어나 피가 묻은 채로 한 눈을 겨우 뜨고 깜빡이던 큰딸 얼굴을 떠올렸다. 내게 죽음과 탄생이란 이 두 얼굴이구나, 염을 끝낸 할머니를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늦은 밤 장례식장에 내 손님들이 찾아왔다. 4시간 거리도 마다 않고 시부모님과 시누들, 시아주버님들과 시조카까지 내려와 준 것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숫기도 사교성도 없으면서도 엉뚱하게 반항적이던 내 어린 시절을 기억하던 고모 삼촌들은 사랑받고 사는구나, 참 시집을 잘 갔구나 하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 방문이 그간 만나지 못했던 세월들을 단편적으로 보여준 셈이 되었다. 감사했다. 그중에 큰고모부는 내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시며 '결혼을 잘하면 사람이 이렇게도 변하는구나. 참 잘했다.'고 말해주셨다.
그리고 지난 월요일 근무 중에 큰고모부의 부고가 전해져 왔다. 흑색종으로 오랫동안 고생해 오셨다고 했다. 옷장 구석에 있던 검은 원피스와 코트를 꺼내 입고 남편은 급하게 검은 구두를 하나 구입해서 짐을 꾸려 지방으로 향했다. 큰고모네가 거기 계신다는 말만 들었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한밤 중에 도착했을 때 도시는 어둠에 싸여 있어 윤곽도 알 수 없고, 낯선 장례식장만으로 첫인상을 갈음해야했다.
어린 시절 선망의 대상이었던 언니들의 아름다운 얼굴들이 큰고모부의 영정 앞에서 눈물로 젖어있는 것을 보니 그 상실감이 전해져 왔다. 미처 생전에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영정 앞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다정한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셨고, 무척 애처가셨다, 많은 일기를 남기셨다. 그렇게 나는 큰고모부에 대해 사후에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빈소의 tv에서 재생되고 있는 생전의 사진들을 보며 이런 곳도 다녀오셨구나, 손주들과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셨구나 하고 알게 되었다.
남편과 내가 막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아빠는 1층 로비에 서계셨다. 현재 빈소에 안치되어 있는 고인분들의 얼굴과 상주와 자식이며 사위 며느리며 손주들의 이름들을 번갈아가며 보여주고 있는 스크린 앞에 서계셨다. 내가 느리게 다가가 말을 걸기까지 한참을 올려다보고 계셨다. '부모님들께서 다 가시니, 이제 우리 형제자매 차례가 오는구나.' 큰고모부의 부고를 가족 단톡방에 공유하며 함께 보냈던 엄마의 메시지가 아빠의 뒷모습을 설명해 주었다.
인사를 마치고선 빈소 한쪽에서 부모님과 마주 보고 앉아 아주 늦은 저녁밥을 먹었다. 여느 때보다 엄마는 우리를 더 챙겼다.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다며 상을 직접 다 차려주시고, 다 먹은 것이 있으면 더 가져다주시고, 손 닿지 않을까 자꾸 맛있는 반찬들을 사위 앞으로 딸 앞으로 당겨주시다 '거참, 그릇 좀 가만히 냅두시요!' 아빠에게 너털웃음 섞인 한소리를 듣기도 했다.
야생화나 유명하지 않은 문화유적을 찾아다니는 취미가 있는 아빠는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을 차가 들어가기도 힘든 길로 데리고 다니셨다. 그래서 눈이 많이 오거나 비가 많이 내리는 계절에는 고립당한 적도 몇 번 있었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에는 길을 잃고 헤맨 적도 많았다. 내가 결혼하고 나서는 아이들을 데리고 보물 같은 신기한 야생화가 숨어있는 인적 드문 길로 많이 놀러 다녔다. 그래서 아이들은 코로나 시기에도 심심하지 않았다. 키즈카페나 놀이터 가자고 조를 법도 한데,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따라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는 것을 재밌어했다.
몇 년 전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상경하던 길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 꽃들은 그 산책길들은 이제 어떻게 찾아가지. 지도에서 검색할 수도 없는 그 길들을 우리는 영영 잃게 되겠네. 이미 차도 드문 어두운 고속도로 위의 차 속에서 그런 생각을 하며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들에게는 내가 그랬듯 가족 보다 친구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계절이 오고, 나에게는 엄마 아빠가 그러셨듯 자식들 공부시키랴 먹여 살리랴 정신없이 일하며 돈 벌어야 하는 계절이 오고, 엄마 아빠에게는 자식들을 독립시켜 놓고서 비로소 다시 자신의 인생의 살아낸다 싶으면서도 형제자매를 떠나보내야 하는 계절이 왔다.
각자 봄과 여름과 겨울의 계절을 살아간다. 나는 가을 초입에 들어섰음을 느낀다. 가장 사랑하는 계절 가을. 부디 그 가을이 너무 빨리 지나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더디 갔으면,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