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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시바휘바

by 도라

무심한 엄마로 살아오던 어느 날, 모처럼 아이 학원 숙제를 확인했는데 깨끗한 페이지 투성이다. 성실히 챙기지 못한 자책이 아이를 향한 화를 돋군다. 인생은 시바다. 피곤한 어느 날, 퇴근하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다 일어나니 밤 9시다. 아이들 저녁을 못 챙겨줬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둥지둥 부엌으로 달려가는데 아이들이 라면이며 남은 밥이며 데워서 먹고 치워놓기까지 했다. 인생은 휘바다.


요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다. 혼자 있을 때, 위기가 닥쳤을 때, 좋은데 긴장될 때 혼자 중얼거린다.

'이런 시바휘바..'

마냥 좋을 때의 변주도 있다.

'이런 휘바휘바..'

어딘가 묘하게 기분 나쁘다 만 것 같은 이 말을 내뱉을 때마다 남편은 아이들이 따라 한다며 질색하고 아이들은 웃겨 자지러진다. 남편의 말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 말이 요즘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 내 삶과 싸우겠는가, 욕을 하겠는가, 자조라도 해야지. 참 반갑게도 자조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나를 비웃는다는 뜻과 자기 발전을 위하여 애쓴다는 뜻. 거의 대척점에 있을 것 같은 두 가지 뜻이 한 단어에 머물고 있다니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시바휘바다.


어쩌면 두 가지 뜻은 맞닿아있다. 자조는 자학이 되는 것을 막는다. 내 실수가 만천하에 드러났다면 어떡하겠는가. 나를 들들 볶아 못살게 굴어 침울한 해저로 끝없이 침몰하게 둘 수는 없다. 다니카와 슌타로의 그림책 [구덩이]의 주인공처럼 나만의 구덩이를 푹푹 파내려 가 이 내 몸뚱이 하나 꽂아 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출근도 해야 하고 등교도 시켜야 하는 삶에서는 꿈만 꿀뿐이다. 그래서 웃는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다니. 웃긴 구석이 있구먼.'

혼자만 아는 실수를 했을 때에는 더 관대해진다.

'이런 허술한 모습. 제법 귀엽잖아, 나.'


수년 전 우울함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지점을 넘어서 찾아간 상담사 선생님이 말했다.

"자기 비하적 사고가 자동화되어 있네요."

이 자동화를 저지하기 위해 선생님이 추천한 주문은 '아임 오케이'였다. 친숙한 '괜찮아'도 안되고 '나는 문제없어'도 네거티브한 표현이 들어가기 때문에 좋지 않다며 '아임 오케이'여야 한다고 하셨다. 자동화 시스템이 가동되려 하면 '아임 오케이'를 육성으로 내뱉어 작동을 저지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스템의 범위와 파워란 실로 대단해서, 다정한 주문만으로는 저지가 어려웠다. 더 센 친구가 필요했고 어느 날부턴가 낯선 시바휘바에 마음을 의지하게 되었다.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만능 치트키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아무리 심각한 상황이라도 이 말을 외치고 나면 한번 힘이 피식 빠진다. 잔뜩 굳어있는 어깨가 잠시 풀린다. 어처구니없어 웃게 된다. 늘 지나치게 진지한 캐릭터였던 어린 시절에는 웃어야 하는, 웃어도 되는 포인트를 몰라 고달팠던 시간이 많았다. 그 진지함을 벗어나기 위해 애처로운 노력을 했음에도 여전히 웃긴 사람은 못되지만, 그래도 나의 대외적인 웃음 지수는 올라가고 있다고 믿는다.


더군다나 대내적인 웃음의 기준은 나밖에 정할 사람이 없다. 아무리 누가 뭐래도 스스로가 웃기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내가 웃기면 웃긴 것이다. 더 이상 나를 힐난하지 않고, 그냥 웃어넘기겠다고 하면 그런 것이 된다. 사실 시바와 휘바를 나눠서 생각한다면 시바의 비율이 압도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휘바였던 순간을 떠올려 시바를 저지하는 것은 생각보다 효과적이다.


오늘은 퇴근 후 남편 따라 차 배달을 갔다가 다시 그를 일터로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와 급하게 냉장고 채소를 모두 때려 넣은 볶음밥을 볶고, 발목을 삐끗해 당분간 깁스 신세를 지게 된 큰딸을 학원에서 데리고 왔다. 그리고 큰딸 밥을 차려주고, 아들을 데리고 클라이밍장으로 향했다. 흡사 좀비 같은 모습을 하고 9시 반에 아들의 운동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10시쯤 집으로 돌아오니 딸들은 이미 잠자리에 들었고, 아들 머리까지 말려주고 나니 10시 반이다. 이렇게 구구절절 엄살떨고 있는 내 하루의 마무리가 시바다.


욕실에서 나오며 다음 달에 있을 클라이밍 대회에 얼마 큼의 성적을 내고 싶냐고 아들에게 물으니 아들이 답했다.

"별로 잘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난 잘하고 싶으면 재미가 없어. 근데 잘하고 싶지 않으면 재밌게 연습할 수 있어서 또 잘하고 싶어져. 그러니깐 잘하고 싶지 않으면 잘하고 싶어져. 조금 어렵지?"

방금까지 수다 떨며 늑장 부리다 엄마에게 눈총 받은 개구진 얼굴로 어려운 말을 해대는 아들. 글 쓰겠다고 노란불 스탠드 하나 켜고 노트북을 펼친 엄마 옆에서 "엄마, 지금 분위기 좋지? 우리 오늘 밤에 이대로 보내자." 하고서 씩 웃는 기막힌 아홉 살. 모두 잠든 밤에 둘이서 낭만적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래서 오늘은 또 휘바로 뒤집힌다. 그렇게 오늘의 총합계는 시바휘바인 걸로. 늘 그랬듯 오늘의 인생도 시바휘바여서 무사한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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