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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드를 올리고

by 도라

열흘 연속 세수를 못하고 잤다. 물론 이도 못 닦았다. 이미 글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지만 냄새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열흘간 거의 탈진해서 밤마다 강제 로그아웃 되듯이 잠드는 일상을 반복했다. 컨디션은 계단 내려가듯이 확연히 뚝뚝 떨어지고 오한은 아무리 두꺼운 카디건으로 솜이불로 꽁꽁 싸매도 가시질 않았다. 몸살이었다. 무리한 일정, 갑자기 늘어난 업무시간, 변덕스러운 날씨, 살아가는데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들 때문이었다. 달라진 것은 그 일들로부터 나를 지켜주던 젊음의 용량이었고 변함없는 것은 제 몸을 살피지 못하는 내 눈치였다.


친절은 여유로움에서 나온다고 했다. 여유롭지 못한 일상은 사소하게 서운했던 것들에 불을 지피기 마련이고 결국 불똥이 어디론가 튀고 말았다. 깊은 밤 어느 단톡방에서 버럭 서운했던 마음을 밝혀버리고 말았다. 나의 말들은 어리석었고 경솔했다. 이기적이었다. 갑작스러운 대화의 흐름에 놀란 전화가 걸려 왔고 나는 속상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달래는 말들은 어른스러웠고 조심스러웠다. 사려 깊었다. 눈물의 대상은 속상했던 일로부터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그리고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바뀌었다.


그런 데에 서툴다.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슬기롭게 풀어내는 데에 무척 서툴다. 나도 남도 모르게 속상함을 화약처럼 한 톨 두 톨 쌓아두었다가 난데없이 뻥 터트려서 난감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 이후엔 경멸의 침묵이 무겁게 자리 잡거나, 수습을 위한 비겁한 눈빛이 스치거나, 대개는 또 다른 누군가의 연쇄적인 폭발로 이어진다. 파괴적인 결말뿐이기에 시간을 들여 내색하지 않으려 연습했다. 연습은 보잘것없었다. 내색하지 않기 위해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속으로 터트렸고, 당연히 내면은 너덜너덜해졌다. 툭 치면 깨져버릴 얇은 설탕 유리병 같은 사람이 되었다.


아! 누가 그랬다. 천칭자리는 평소에 균형을 잡으려 무척 애쓰지만, 애써도 애써도 너무 기운다 싶으면 그냥 확 엎어버리는 성질이 있다고. 깊은 빡침으로 우주 저 멀리 저울을 와장창 내던지는 나를 종종 상상한다. 그래도 어른씩이나 되어 별자리 탓을 할 수는 없어 방법을 바꿨다. 화내지 않는 법이 아니라, 화내는 법을 연습하기로 했다. ‘잘’ 내보기로 했다. 연습을 위해선 유리멘탈인 내게 작은 실패들이 필요했다. 나를 넉다운 시키지 않고 맷집을 불려 줄 작은 실패들.


그래서 자동차 검사 접수 업무를 시작했다. 내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과연 그랬다. 여러 타입의 사람들과 가진 짧은 만남과 대화 속에서, 나는 자잘한 실패를 꾸준히 겪었고 거기서 배운 바는 이랬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내가 느끼는 민망함은 대개 나만의 상상일 확률이 크다.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상대가 불만을 느꼈을 경우엔, 그럴 수도 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진부한 이야기지만 경험의 통계가 쌓이니 비로소 그 진부함이 빛을 발했다.


실패의 적립은 화를 낼 용기를 선물했다. 화를 지피려면 안전구역이 어디까지인지 알아야 하기에 그 바운더리를 찾기 위해 자잘하게 조심스럽게 감정들을 잽처럼 날려 보냈다. 단톡방에서의 폭발은 그 잽들 중 하나였다.


“선생님의 예민함에서 나오는 작업들이 나는 좋아. 그래서 이번 일 때문에 선생님이 그 예민함을 버리거나 바꾸려 애쓰진 않았으면 해.”


그리고 그 잽은 늦은 밤 수화기 너머 들려온 이 한마디에 덕분에 처음으로 경계선에 가 닿았다. 여기까진 안전구역이야. 내겐 이렇게 들렸다. 그 감정 표현은 필요한 것이었어. 그 기준은 나를 안도하게 했다. 바다를 떠돌다 드디어 육지에 발을 디뎠다. 정작 발화자는 몰랐겠지만 그 안도감이 나를 울렸다.


틀이라는 것, 경계라는 것, 그것이 적정하게 둘러질 때에 삶에 선사하는 안정감은 따스하고 포근했다. 나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을 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 것의 힘도 대단했다. 그 힘으로 다시 얼굴을 볼 때에 너무 우울하지 않은 사과를 건넸고, 나를 향해 웃어주는 얼굴들을 믿었다. 저울은 참작할 수 있을 정도의 기울기로 돌아왔다.


지친 일과 끝에 고정순 작가의 그림책 [가드를 올리고]의 주인공을 생각한다. 주인공은 산을 오른다. 멍투성이다. 그럼에도 가드를 올리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앞으로 나간다. 나도 가드를 올려본다.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어둠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 어딘가 또 다른 육지에 가닿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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