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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길 참 잘했다.

by 도라

아름다운 생일을 보냈다. 많이 웃었고, 세 번 울었다. 생일 전날 남편과 함께 본 영화 [어쩔 수가 없다]의 엔딩 크레딧에서 한번 펑펑 울고, 생일날 아침 큰아이가 나를 위해 여름부터 연습해 플룻으로 연주해 준 [Autumn Leaves]를 듣고 펑펑 울었다. 생일 저녁에는 보고 싶었던 [위대한 개츠비] 뮤지컬을 보고 그 찬란한 에너지에 또 한 번 울었다.


돌이켜 생각을 해보니 기쁜 날도 있었겠지만 슬펐던 생일들만 줄줄이 떠오른다. 좋았던 일은 대충 저장하고 나빴던 일들은 기어코 저장해두고 마는 기억력의 사악함 탓도 있겠지만, 그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생일이 다가오는 것이 항상 기쁘면서도 긴장되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생일을 챙겨주는 사람들의 수를 내 못난 사회성의 지표처럼 생각했으므로 평가받는 날처럼 여기곤 했다.


나이가 들어서일까.(물론 아직 나는 충분히 젊다.) 그런 긴장의 감정은 점점 옅어지다 올해 전환점을 맞았다. 생일이란 늘 누군가 나를 위해주길 바라는 날이었는데, 올해는 달랐다. 누구보다도 내가 나를 위해주는 날로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생일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혼자 달렸다. 처음으로 러너스 하이를 느낄 수 있다는 30분까지 달려보았다. 그 덕분인지 땀을 흠뻑 흘린 채로 집에 오자마자 지치지도 않고 아침을 준비했다. 가족과 함께 먹을 돼지갈비를 재우고, 미역국을 끓이기 위해 미역을 불렸다. 미역국을 끓이며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있었나? 누군가의 탄생을 축하하는 요리를 하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혼자 고요히 생각하다가 일찍 일어나 소파에 앉아 있던 아들을 동참시켰다.


이제부터 엄마가 미역국 끓이는 법을 알려줄 거야. 엄마한테 끓여달라고 알려주는 게 아니야. 잘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꼭 아내 생일마다 미역국을 끓여줘. 그래서 반절은 아내와 먹고 반절은 장모님께 가져다 드려.

이제 고작 아홉 살인 아들은 사뭇 진지한 엄마 얘기를 반절은 참을성 있게 반절은 대수롭지 않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엄마 역할을 하나 해냈다는 뿌듯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기억하는 한 미역국을 끓일 때마다 알려줄 것이다. 아들이 언젠가는 가장 믿고 사랑하게 될 누군가와 그 누군가를 존재하게 해 준 사람. 그 사람에게도 꼭 감사를 표했으면 해서.


샤워를 마치고 얼추 생일상을 차려놓으니 새벽일을 마친 남편이 내가 좋아하는 무화과가 올라간 치즈케이크를 가지고 집에 도착했다. 아침 겸 점심밥을 먹고, 케이크를 먹고, 어떤 생각으로 구입했는지 샅샅이 다 들여다보이는 둘째 셋째의 귀엽고 맛있는 선물들을 받아보고, 큰 아이의 연주를 들으며 울고 있는데 내 마음을 훔친 듯 “나 다 이룬 것 같!!!”다며 남편이 선수를 치려 한다. 전날 본 영화가 생각나서 “그런 말 하지 마. 큰일 나.”하고 남편의 등을 한 대 탁 치며 말을 자르고, 눈을 부라리고선 이해불가의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아이들을 그냥 둔 채 둘이 킥킥 웃는다. 살다 보니 시트콤 속 다복한 가정의 한 모습을 연출하는 날도 온다.


계획을 세우는 데 익숙한 편이 아니지만 이번 생일에는 꽤 계획을 세웠다. 계획의 목표는 물론 생일 주인공인 나의 행복이었는데, 나의 행복을 위한 리스트의 최상단에 남편과 아이들의 행복이 자리 잡고 있기에 남편과 뮤지컬을 보는 동안 공연장 근처에서 아이들이 즐길거리들을 미리 예약해 두었다. 아이들의 보호자는 감사하게도 큰 시누가 맡아주었다. 우리는 일찍 서울로 출발해 미리 예약해 둔 멕시코 식당에 가서 낯선 멕시코 음식을 실컷 먹고, 시누와 아이들을 방탈출 카페에 데려다주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공연은 완벽했고, 다시 아이들과 합류했을 때 아직 즐거움으로 들떠있는 아이들이 들려준 이야기들도 완벽했다.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떨림과 울림]에서 저자인 김상욱은 우주의 떨림이 생명체를 탄생시켰고, 그에서 탄생한 생명체인 인간은 울림으로 답을 한다고 말한다. 우주의 변덕스러운 떨림 속에서 태어난 나의 부모님과 그로 인한 떨림 속에서 태어나는 나를 상상해 본다. 그 이전의 또 다른 떨림에서는 남편이 태어났고, 우리가 만나 이룬 파장 안에서 또다시 나의 아이들이 태어났고, 우리는 서로를 통해 울리고 울려진다. 그 우연하고도 필연적인 떨림과 울림들이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아름답게 다가온다. 울려줄 수 있고 울림 당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태어나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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