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만에 만난 지인과의 식사 자리에서 누구에게도 한 적 없던 말을 툭 뱉어버렸다.
전 주기적으로 죽고 싶어요.
우리는 순간 푸학하고 같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농담으로 건넨 말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 말을 서두로 그동안 몰랐던 서로의 힘듦을 나누었다. 매일의 마음이 같진 않았겠지만 대략의 통계를 내보면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사흘에 한번 꼴로, 20대 시절에는 일주일에 한번 꼴로, 30대에는 한 달에 한번 꼴로 죽고 싶었다. 가장 비참할 때는 스스로가 너무 못나게 느껴져 보석 같은 내 아이들을 떠나려는 마음까지 들 때다. 분명히 이렇게 못난 나보다 훨씬 더 내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처럼 잘 키워줄 수 있는 다른 엄마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마음들은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지금에 와서는 많이 잠잠해졌다. 그렇기에 이제 글로 쓸 수 있다. 마흔이 되어 많은 것이 달라졌다.
10대에는 스스로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웠고, 20대에 프로이트를 알게 되면서는 과거에 나 자신의 것들을 포함해 나를 괴롭혔던 일들과 사람들, 돌이킬 수 없음에 분노했고, 30대에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엄마로서 내 아이들을 대하는 것 같은 사랑, 관심, 안정을 충분히 얻지 못한 어린 시절의 내가 가여웠다.
40을 겨우 채우고, 단단하고 따뜻한 남편의 품에 안겨 깊이 안심하는 나를 느낀다. 품에서 얼굴을 빼꼼히 빼서 남편의 얼굴을 보면 남편의 얼굴은 문득 낯설다. 이렇게까지 안심해 버리는 나와 이렇게까지 나를 안심하게 해주는 그가 낯설다. 20대에는 행복이 낯설었다. 사람들과 너무 잘 지낼 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지나갈 때, 나는 불안을 느꼈다. 이 행복이 깨질까 봐 조마조마했다. 늘 그랬듯이 내가 모든 것을 망칠까 봐 두려워 분명하게 행복할 수 없었다. 굽이치는 강물 위를 두둥실 떠내려 가는 노란색 풍선들처럼 나의 것은 없어서 굽어지는 물길 따라 곧 사라져 버릴 것들이었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을 주는 풍선들은 잔인했다. 들뜨는 나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누구를 탓할 수 없다. 그때 우리는 다 각자의 사정이 있었고, 우리는 다 애썼다. 모두의 최선이었다. 30대 중반쯤 되니 알았다. 누구를 탓해도 읍소해도 과거는 달라질 길이 없고, 어린 시절의 나도 성인이 된 나도 그토록 가엾이 여기고 기꺼이 모든 것을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남편의 품에 안겨 나는 깊이 외로웠다. 그렇기도 했다. 그 외로움은 슬픔은 아니었다. 이제 내가 감내할 수 있게 된 나의 단편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를 사랑하는 쪽으로 한걸음을 딛었다. [모든 삶은 흐른다]에서 로랑스 드빌뢰르는 이렇게 말한다. 어디서든 나 자신을 찾는 것이 진정한 나르시시즘이며, 진정한 자신과 함께한다면 그곳은 진짜 무인도일지라도 무인도가 아닐 것이라고.
타인들로부터 종종 건네받는 ‘어렸을 때부터 밝은 성격이었을 것’이라거나 ‘큰 고생을 안 해보고 살았을 것' 같다거나, ‘늘 긍정적이었을 것’ 같다는 말들은 내 인생에 수여하는 훈장이다. 나를 잘 돌보아낸 스스로에게 건네는 상. 시시콜콜하게 남에게 나를 이해시키지 않아도 나는 나로 살 자신이 있다는 용기의 한걸음. 나만 아는 그 걸음을 딛어내게 하는 훈장이다.
종종 외향적인 성격이어서 더 많은 이들과 만나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면 내 삶은 더 빠르게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의 삶이 보통의 삶과 달라 동정을 사게 되거나, 그 동정이 지쳐 떠나가거나, 그로 인해 사람들 앞에서 보통의 말을 하지 못해 구석으로 밀려나던 시간들이 지금도 잘했던 것인지 못했던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시간들은 나를 고립시키고 또 고립시켜, 살아낼 다른 방도를 찾아내도록 이끌었다.
차도로 창가로 향하던 걸음들을 붙들고, 인도로 산책길로 딛도록 이끌어 낸 것은 책들의 문장과 누군가의 말들과 믿음과 시간이었다. 도서관에서 대출을 하는 것보다 책을 구입하는 것을 선호하는 이유다. 읽었던 책은 내 책장에 꽂아두어야 한다. 책을 문구들을 내 삶의 방패로 무기로 여겨서가 아니다. 그들을 내 친구로 여겨서다. 그들은 나를 평가하지 않고 주기만 한다. 그들은 나를 도왔고 가르쳤다. 그리고 기꺼이 물리적으로 책장에 남아준다. 다른 사람과의 연결고리가 되어준다. 그게 도서관을 열었던 이유고, 이제는 책방을 운영하는 이유다.
누군가란 나의 가족이다. 무조건적인 무한대의 사랑을 준 나의 아이들. 고작 3kg, 4kg이던 핏덩이들이 나를 쓸모 있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남편은 내가 빗장을 열고 세상과 화해하도록 만들었다. 세상과 나 사이의 오해를,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또 살아가게 되었다. 존재의 당위성. 가족은 내게 그것을 선물해 주었다. 남편에게 종종 말한다. 시간이 야박하지만은 않다고. 참 고생했다 내게 말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 때 기꺼이 돕고 베풀며 살아야 한다고. 그러면 남편은 나를 꼭 안아준다. 그것이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그의 거친 노동의 냄새를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내 삶이 해피엔딩일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른다. 죽고 싶은 마음이 또다시 강하게 피어오르는 날이 잔인하게도 분명히 올 것이다. 그때는 그 지점까지 살아낸 시간이 또 나를 붙들 것이다. 책을 읽은 기억과, 아이들과 가족들과 나눈 사랑에 대한 말들의 기억과, 이 글을 썼던 기억이 나를 또 붙들어 낼 것이다. 그래서 기꺼이 나 또한 물리적으로 이 세상에 남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