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절대 굳지 않는 점토 같아. 그거 뭐라고 하더라? 천사점토? 절대 딱딱해질 수 없을 것 같아.”
유토. 조형물을 찍어 내기 위해 기본 조형을 만들어 내는 점토. 굳지 않아서 틀을 만들고 난 후엔 벅벅 긁어내 재사용이 가능하다. 어렸을 적 처음으로 유토를 접한 큰 딸은 굳지 않는 점토를 마술처럼 신기해하며 아꼈다. 그러다 어제 귀갓길에 갑자기 그 기억이 떠올랐는지 그런 말을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엄마 아빠에 대해 처음으로 평가했다. 의심할 바 없이 완벽한 세상이자, 모든 것들의 진실에 대한 집합체라고 생각했던 나의 엄마 아빠가 완벽한 그 무엇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은 사소한 것들이었다. 낡은 티셔츠를 잠옷으로 입는다든지, 반찬 그릇을 내놓을 때 테두리를 깨끗이 닦지 않는다든지, 금연 선언을 하고선 이내 다시 흡연 장면이 발각된다던지 그런 것들이었다. 부모님은 조그만 내가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자질구레한 흠을 눈치채고선 장기 기억으로 쌓아둘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엄마 아빠는 지금의 나보다 더 어렸다. 그들의 그릇에 빠진 이들을 찾아내던 발칙한 꼬마애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퇴근 후 아이들이 남기고 간 딱딱해진 아침밥을 퍽퍽 긁어 다 식은 국에 말아서 떠먹는 엄마가 되었다. 불도 켜지 않고서 먹다 막내가 키패드를 삑삑삑 누르며 들어오는 소리에 황급히 그릇들을 겹쳐 쌓아 싱크대에 던져 넣는다.
아무리 아닌 척해도 숨겨봐도 분명 나의 아이들도 역시 엄마라는 세계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큰딸은 또다시 어마무시한 숙제를 내어준 학원 선생님을 떠올리며 딱딱하게 굳은 점토 같다고 한다. 그 투덜거림 속에서 내가 느낀 안정감을 아이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 마냥 싫은 건 아닌 것 같은데.’하고 던져본다. ‘그치, 다 장단점이 있지!’ 유쾌히 흔쾌히 대답하는 아이가 사랑스럽다. 학원 선생님은 딱딱한 굳은 점토, 엄마는 절대 굳지 않는 유토. 그 정도면 엄마로서 합격일까 아닐까. 큰 아이를 내려주고 주차를 하러 가는 길 골똘히 머리를 굴려본다.
‘부모가 우는 걸 보는 것은 정말로 무섭지. 어른들이 유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것은 정말로 무서워...’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에서 이 부분을 읽었을 때,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산부인과에서의 출산, 결혼식과 첫 만남을 거슬러 올라가 이제는 생각만 해도 어색한, 혼자 자취를 하던 그 시절 그때부터 상상해 왔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나의 아이에게 내가 미워하는 스스로의 약한 모습을 들키는 그런 소름 끼치는 상상. 모름지기 엄마란 강한 인내심과 정신력을 발휘해 아이들 앞에서 경거망동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그런 이유로 친정엄마를 많이도 탓했다.
그런데 내가 아이를 셋이나 낳고, 게다가 왕 울보 엄마에 말랑 점토 엄마가 되어 버릴 줄이야. 소름 끼치는 상상은 현실이 되었고, 내게 무거운 업보의 길을 걷게 하고 있다. 지쳐 울 때마다 정세랑의 소설 속 저 대사를 떠올린다. 치면 맞은 대로 찌그러지고, 찌르면 찔린 대로 옴폭 패이는 그런 유토로 된 엄마는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임신 혹은 출산과 동시에 누구보다도 든든한 방어막과 안전한 울타리의 역할을 해내기를 기대받는 캐릭터인데.
습관적인 자기 비하에 빠지기 전에, 쥐고 태어난 패가 어떻든 내 패를 아껴 잘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보자. 어딘가에 팍 던져진 유토를 생각한다. 어느 모양이든 그 모양대로 탁 달라붙는다. 상대를 상하게 하지 않은 채로 밀착한다. 날카롭고 둔탁한 것이 와도 중간에 충격을 흡수해 뒤까지 가닿게 하지 않는다. 필요를 다하면 부드럽게 긁혀 자리를 떠난다. 그게 유토의 힘이 될 것이다. 유토의 엄마라면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