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찬 지하철 칸 안에서 나는 숨 쉬는 법을 다 잊어버린 사람처럼 헉헉대며 빙글빙글 도는 머리가 옆으로 넘어가지 않게 최선을 다해 서 있었다. 아직 집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어찌하면 좋을지 머리가 아득해졌다. 내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이 지하철 안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 납작한 배에 멋 낸다고 신은 구두를 보니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몇 정거장을 그렇게 고민하며 버틴 후 결국 지하철에서 내렸다.
임신 6주 차였다. 택시 안에서 숨을 고르며 깨달았다. 지금 나는 약자구나. 배려를 받아야 하는, 혹은 요구해야 하는 그런 사람. 그래서 되려 누군가에게는 불편해질 수도 있는 사람.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울컥했다. 지하철을 타는 일 따위가 무모한 일이 되어버리다니.
누군가에게 호의를 요구하는 것도 받는 것도 내게는 불편하던 시절이었다. 호의를 받는 스스로가 약자처럼 느껴졌다. 내가 약자가 되어버리는 그런 상황이 싫었다. 숫기가 없던 나는 주는 것도 정말 서툴러서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단순한 구조로 움직였었다.
다시 기차 얘기다. 지금이야 직접 차를 가지고 왔다 갔다 하지만 첫째, 둘째, 셋째의 갓난 아이 시절, 친정으로 가는 데에 가장 만만한 교통수단은 기차였다. 기차 안에서는 기저귀도 갈 수 있다. 테이블이 있으니 과자나 색칠 공부, 종이접기 따위를 늘어놓기도 좋다. 그러다 아이가 졸려서 울면 열차 탑승구 쪽으로 가서 서 있는다. 눈치 볼 필요도 없다.
문제는 아이가 아이들이 될 때 생겼다. 화장실 가는 횟수도 두 배, 울고 짜증 내는 횟수도 두 배, 요구하는 것도 두 배라 정신없이 차량 문간을 들락날락해야 한다. 아이가 셋이 되면 서로 시시각각 하고 싶은 일도 죄다 다르고, 싸우기까지 해서 세배가 아니라 모든 것이 3의 제곱으로, 아홉 배로 증폭된다.
처음 셋을 데리고 홀로 기차를 탄 날이었다. 그날도 역시 표에 써진 좌석 번호는 아무 의미가 없어지고, 주야장천 출입구 옆 간이의자 신세였다. 이럴 거면 입석을 끊을 걸 그랬지. 예매하며 슬쩍 본 저렴한 입석 가격이 내 마음을 긁었다. 두 개의 간이의자 중 하나는 막내를 안은 내가 앉고, 나머지 하나는 큰 아이 작은 아이 둘이서 옥신각신한다. 한 아이 당 하나씩 자리를 정해주고 다시 일어서서 막내를 달랬다. 한 명은 졸려서 울고, 한 명은 들어가기 싫다고, 한 명은 들어가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다. 아! 나는 지나치게 용감했다.
울던 막내가 잠이 들고, 다시 좌석으로 돌아가니 나머지 둘도 잠이 들었다. 부산스럽다 고요해진 차량 안으로 차장님이 걸어오셨다. 앉은 채로 불편하게 잠이 들어 있는 아이들을 보시더니 다가오셔서는 자리가 남으니 편히 눕혀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정말 그래도 될까요? 네, 그럼요. 도움을 받아 아이 셋을 남는 자리에 눕히고, 갑작스레 찾아온 자유의 시간에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문제는 거의 도착했을 무렵 다시 생겼다. 아이들이 아무리 깨워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 시간 전 제발 잠이 들기를 바랐던 상황과 정 반대의 상황이었다. 친정 엄마로부터 우리의 도착 시간에 맞춰 플랫폼에 당도하지 못할 것 같다는 전화가 왔다. 자고 있는 일곱 살, 네 살, 한 살 아이들과 짐가방, 트렁크 하나를 무슨 수로 혼자서 다 내릴까. 애가 탔다.
친정 엄마와의 애타는 통화가 끝나자 뒷자리에 앉아계시던 아저씨께서 말을 거셨다. "제가 하나 안고 내려도 될까요? 저도 딸 셋 아빠여서.." "트렁크는 이리 주세요." 그 옆에 앉아계시던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비몽사몽으로 깨어난 첫째는 트렁크를 끌고 가는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내리고, 둘째는 딸 셋 아저씨 품에 안겨서, 나는 셋째와 가방을 들고 내렸다. 잠든 아이 셋과 처음 만난 어른 세 사람이 플랫폼 벤치에서 쑥스럽게 1분 정도 서성이고 있다 보니 친정 부모님께서 도착하셨다. "뭐, 금방 오셨네요." 그 말을 남기고 두 분은 사라졌다.
이 이야기를 쓰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막상 당시에는 당황스럽고 정신이 없어 더 피해가 되진 않을까 긴장한 상태로 그저 감사하다는 말만 잔뜩 건넸다. 그런데 되돌이켜 곰곰이 생각하며 글을 적다 보니 대가를 바라지 않은 그 호의에, 그 단순함에 자꾸 눈물이 난다. 많은 공감과 배려가 함축되어 있었던 그 호의.
그날 밤 기차 안에서 나는 남에게 피해가 될까, 그래서 비난받지는 않을까 내내 마음 졸였었다. 소란스럽던 아이들이 모두 잠든 후 나의 외롭고 민망하던 마음을 기억한다. 아무도 뭐라고 하진 않았지만, 일순 조용해진 기차 안 동행인들의 확인할 길 없는 시선과 생각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때 차장님과 아저씨, 아주머니께서 손을 내밀었다. 엄마로서의 나에 대해서나, 나의 육아 방식에 대해서나, 이 힘든 상황을 자초한 나의 선택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 없이 그저 도움의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이미 몇 년이나 지나버린 일이고 세 분의 인상도 가물가물하지만, 그 순간을 더듬다보니 괜스레 눈물이 왈칵 쏟아진 것이다.
처음의 사건 이후, 배가 볼록한 임신부가 되고 나서도 나는 지하철을 되도록 타지 않았다. 내가 승차하는 것만으로 일면식도 없는 타인들에게 배려를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도움받는 데에 미숙했다. 혹시 그 도움이 반대로 공격이 되어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부터 앞섰다.
그런 내가 아이 세명을 10년 동안 키워냈다. 그 시간은 '약자'라는 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도록 했다. 누가 약자일까. 약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배려와 동정이 갈라지는 지점은 어디일까. 배려를 받는 약자가 된 것을 마치 을이 된 것처럼 속상해했던 20대의 나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
누구나 약자인 부분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누구나 약자의 입장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 내가 마주친 바로 그 순간에 약자인 사람에게. 그러면 나의 약한 부분이 드러나는 순간에 나에게 또 다른 호의가 돌아올 것이다. 만약 타인에게로부터 아무런 호의도 받지 못한다 해도 나는 나에게 베풀 수 있다. 내가 타인에게 베풀었던 기억으로 내게도 호의를 베풀 수 있다. 그렇게 호의는 계속된다.
호의의 사전적 정의는 친절한 마음씨. 또는 좋게 생각하여 주는 마음. 아이를 키워내는 동안 많은 친절한 마음을 받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에게 온 친절한 마음들은 내게 도움받는 법과 더불어 도움을 주는 법도 가르쳐주었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고집스러운 나를 아주 천천히 알게 모르게, 그리고 고집스럽게 가르쳤다.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온 길도 꽤 쌓였다. 여기까지 온 발자국의 힘으로 지금 이 순간, 도움을 주고받는 일로 고민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의 호의 하나를 실어주고 싶다. 그렇게 나의 아이가 믿어 나갈 수 있는 세상으로 힘을 실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