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착같았던 나의 사춘기 시절과는 달리, 초등학생 때에는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네 과목 67점 평균에 40명 되는 반에서 30등을 하고도 아무 생각 없이 집으로 돌아와 "괜찮아! 내 친구 65점 받았데~" 하며 엄마를 열불을 시도 때도 지피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시절 엄마와 산책을 할 때면 나는 엄마에게 나는 "이렇게 공부를 못해서 어쩌지?"라고 물으면 엄마는 이유도 근거도 없이 우리 봄이는 잘할 거랬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는 말에 갸우뚱했던 시간들이 있었는데 돌아보면 그랬던 내가 그렇게 좋은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큰 원동력은 우리 엄마의 밑도 끝도 없던 나에 대한 믿음과 내 결정에 대한 지지였다.
남자 친구와의 갈등은 엄마에게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큰 수술을 앞두고 있는 나에게 방학 중인 남자 친구가 나를 위해 한국에 오는 것은 무리라고 단칼에 잘라버렸다는 것 정도, 다른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단 것 정도, 심지어 엄마가 비행기표를 대주겠다고 했는데도 싫다고 했다는 것 정도는 굳이 긴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수술 몇 주 전 밤에 엄마 침대에서 이런저런 긴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말했다.
"엄마, 나 오빠랑 헤어질 생각이야."
"그래, 봄아. 잘 생각했어."라고 대답할 줄 알았던 엄마가, 항상 나에 대한 자신이 넘쳐났던 우리 엄마가 말했다.
"그래, 봄아. 하지만 단 하나만 기억해. 지금 오빠랑 헤어지면 오빠보다 더 괜찮은 사람 만나지 못할지도 몰라. 오빠보다 덜 괜찮은 사람으로 만족해야 할 수도 있고 그러고 싶지 않다면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어."
나는 20대 후반이었다. 나의 글들을 읽어보면 오빠는 세상 잔인한 사람처럼 묘사되지만 사귀는 동안은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한, 나를 깊이 이해하려 해 줬던, 또 많은 것을 참아주었던 사람이었다. 타주로 이사를 갈 땐,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내 이삿짐들을 실어 2박 3일에 걸쳐 나는 운전대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고는 며칠을 운전해 주었다. 우리 엄마가 썼던 다큐멘터리를 나보다 더 열심히 챙겨보았고, 하루에 네다섯 번씩 전화해 하도 실없는 소리만 늘어놔서 왜 그렇게 장난만 치냐고 물어보면 그냥 내가 웃는 게 좋아 매번 새로운 레퍼토리를 짜내는 데에 애를 먹는다고도 했다.
아마 사람들은 이런 오빠라는 캐릭터가 혼란스러울 것이다. 어떻게 같은 사람이 이렇게 상반되는 두 모습을 보였는지.
문제는 그것이다.
세상엔 그저 마냥 착한 사람도 마냥 나쁜 사람도 없다.
한없이 여리다가도 어느 순간엔 이기적 이어지는 사람
남에게 모든 걸 퍼주다가도 돌아서면 무섭게 차가워지는 사람
내 모든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다가도 내가 가장 필요할 때 내 손을 뿌리치는 사람
모든 것에 무심해 보이다가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내 옆에 있는 사람
그렇게 한 단어로 좋은 사람이라고 또는 나쁜 사람이라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없다.
그저 그 사람의 미운면을 내가 안고 갈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항상 내 미래에 대해선 자신감 넘치고 당당했던 우리 엄마의 우려가 이해가 갈 수밖에 없었다.
20 대 후반, 눈 깜짝하면 서른이 넘어갈 나이
이제는 안주해야 하는가
아니면 조금이나마 나에게 더 맞는 사람을 찾아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는가
혹시 내딛는 다면 그 외로운 여정을 나는 견뎌낼 수 있을까
그때, 문득 느닷없이 나는 새들이 생각났다.
아기 새들은 처음으로 날아보려 나뭇가지에서 떨어질 때 어떤 기분일까
자신이 날 수 있다는 걸 어찌 믿고 그 첫 발을 내딛는 걸까
밑엔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하지만 그 첫발을 내딛지 않으면 새는 자신이 앉아 있는 나무가
세상의 전부라 믿게 되겠지
그래서 나도 그 힘든 첫 발을 아무래도 내디뎌야 하겠지 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