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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Oct 24. 2022

팀장님 드릴 말씀 있습니다

EP08. 우리는 왜 징징거리는가

잠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팀장님 드릴 말씀 있습니다.’ 앞뒤 다 까먹은 이 개연성 없는 메신저 한 줄에 전국에 계신 수많은 팀장님들의 심장이 철렁할 겁니다. 놀란 가슴 진정시키고 무어라 답장하기도 전에 두 번째 알림이 울리고 메신저 창에는 ‘잠시 시간 괜찮으신가요?’가 뜰 겁니다. 우리 팀장님들은 ‘왜? 꼭 지금이어야 해?’라고 답장을 보내 시간을 벌어보려고 하지만 팀원들의 마음은 아주 굳건합니다. 가슴속에 시한폭탄이라도 품고 있는 듯 지금 뭐라도 터뜨리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 팀장님의 놀란 마음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대신 단 둘이, 은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에서 보자고 하고 먼저 자리를 뜰 겁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팀장님들이 ‘드릴 말씀’을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는 99.999999% 들어 봤자 좋을 것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빅데이터를 취합해보면 이야기의 주제는 1. 일 못 해 먹겠다. 2. 어떤 XX 때문에 일 못 해 먹겠다. 이 두 가지입니다. 뭐가 됐든 일 못 해 먹겠으니 하소연 좀 들어 달라는 게 ‘드릴 말씀’의 포인트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지금 나 안 붙잡으면 떠날 거니까 알아서 해라 식의 습관적 ‘헤어져’를 외치는 팀원들 때문에 우리 팀장님들은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습니다.






우리는 왜 징징거리는가



 회사와 만난 날을 스마트폰 배경화면에 D-day로 설정한 제가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저 또한 지난 몇 년 동안 동료와 후배들의 ‘드릴 말씀’ 때문에 마음 편하게 주말을 보내 본 적이 없습니다. 가뜩이나 일도 성가셔 죽겠는데 다음 주에는 또 누가 그만둘까, 그만둔다고 했던 저 아이는 출근을 잘할까, 혹시 실수했다고 내가 너무 심하게 얘기한 건 아닌가… 노파심에 가끔 회사 사람들도 꿈에 나옵니다. 줄줄이 쏟아져 나오는 ‘드릴 말씀’에 반쯤 미쳐 회사 블루투스 스피커로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를 틀고 일하던 실장님도 계셨으니 전 아직 정상인 듯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 직장 생활을 해 봤으면 아실 겁니다. 윗선에 열 번 하소연하면 한 번 해결될까 말까 한 게 회사라는 사실을 말이죠. 그럼에도 우리는 꾸준히 면담을 신청해 팀장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무슨 평생 돌멩이 짊어 나르는 시지프스도 아니고, 왜 무모한 일을 계속 벌이는 걸까요. 그건 아마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안에서 무언가 해소되는 게 있기 때문일 겁니다. 반골 정신과 권선징악에 젖어 있는 전 옳은 것을 밀고 나가면 바뀐다는 진리를 믿었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걸 깨달은 후에는 그냥 속 시원하려고 하소연을 합니다. 오죽하면 일하기 싫을 때 뭘 하냐는 동료의 질문에 ‘팀장 괴롭힌다’라고 대답했을까요.






Wake up, sweetheart

정신 차려 이 사람아



 이쯤에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006, 데이비드 프랭클)에서 나온 징징거림의 조건 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패션의 피읖도 모르던 신졸 기자 지망생 ‘앤디 우연히 패션 잡지사 비서로 취업을 하게 되죠. 깐깐하기로 소문난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 냉혈한 태도에 질려 상사 ‘나이젤 사무실로 찾아가 하소연을 하는 장면 혹시 기억하시나요? 거기다 대고 나이젤은 앤디 너는 패션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면서 미란다가  좋아해 주길 바라냐며  잘라 그만 징징대라고 말하죠.


이미지 출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데이비드 프랭클, 2006) 네이버 스틸컷


 일을 하기 전에는 나이젤 아저씨가 너무 심했다에 한 표였지만 지금 보니 업계 이해력 제로에 회의 시간에 코웃음이나 치던 앤디가 노답 신입이었습니다. 물론 직장에서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입은 신입대로, 선임은 선임대로, 관리자는 관리자대로 각자의 고충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충을 이겨내는 대가로 받는 게 월급인지라 징징거리기 위해선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지브리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도 일 하기 싫은 건 마찬가지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로 종종 영화 속 그 장면이 떠오르곤 합니다. 징징거리기 위해서는 나의 힘듦에 당위성을 갖춰야 한다는 뼈 있는 조언 때문이겠죠. 그냥 일이 하기 싫은 건지, 진정 이 상황이 부조리한 것인지 부끄럽게도 감정이 앞서서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잠시 옥상 바람을 쐬며 생각해봅시다. 나는 내 연차와 직무에 걸맞는 노력을 했는지. 안 했다면 다시 사무실로 내려가 할 일을 합니다. 마른행주를 쥐어 짜내는 기분이 들더라도 노동요 플레이리스트에 의지해 앞으로의 징징거림에 대한 당위성을 쌓습니다.


 그리고 당위성이 쌓일 대로 쌓이면 한 번씩 터뜨려 줍니다. 누가 서른 전 까지는 애기라 회사에서 울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울지 않는 것이 좋지만 화가 나면 눈물부터 나오니 어쩌겠습니까. 눈물샘도 불수의근인가 봅니다. 아무튼 실컷 울고 실컷 하소연했으면 이제 자리로 돌아와 할 일을 합시다. 우리네 월급은 한 가지의 하고 싶은 일과 아흔아홉 가지의 하기 싫은 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다 울었니? 이제 할 일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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