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9. 우리는 왜 떠나지 못하는가
회전 초밥 집 회전율 같은 우리네 퇴사율
시월의 마지막 금요일 또 한 명의 퇴사자가 발생했습니다. 이 정도면 퇴사율이 아니라 자리 회전율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말로만 퇴사하겠다고 한지 벌써 일 년. 아가리 퇴사러는 사람인-잡코리아-리멤버를 한 바퀴 돌지만 오늘도 내가 가고 싶은 회사는 한 군데도 없습니다. 행여나 맘에 드는 회사가 있어 잡플래닛 후기를 보면 거기도 여기만 못할 것 같습니다. 마음에 드는 다른 회사 홈페이지 링크를 타고 들어가 조직도를 스크롤해봅니다. 입사한다면 조직도 안에서 내 위치는 어디쯤일까? 아마 맨 아래서 첫 번째나 두 번째가 되겠지… 과연 내가 저 기 쎄 보이는 차장님 밑에서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의 열차가 폭주합니다.
누군가 나를 찾는 메신저 소리에 열심히 답장을 해주고 끼니때가 되면 밥을 먹고 실없는 얘기에 웃고 그리운 얼굴을 만나 한 잔 걸치니 벌써 이번 달도 끝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달과 닮은 다음 달을 또 버텨내겠죠. 그렇게 저는 떠나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말로는 내일 눈 떠보고 안 내키면 출근 안 할 거라고 하지만 (그런 마음이 굴뚝같지만) 몸은 그렇지 않아 30분 일찍 출근하는 게 접니다.
우리가 회사를 떠나지 못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회사 구성원 수만큼 다양합니다. 청년내일채움, 퇴직금, 프로젝트 마감, 목표 적금 액수, 가족 부양, 꽁꽁 언 취업 시장, 귀찮은 이직 준비, 백수 생활에 대한 두려움 등 각각의 이유 때문에 이직을 미루거나 포기합니다. 겉포장은 제각각 일 지 언정 우리네 마음속 저 깊은 곳에는 ‘변화를 향한 두려움’이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 년에 한 번 꼴로 재직 중 이직을 경험해본 사람으로서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웬만한 산 독기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쉽사리 ‘저 그만두겠습니다’라는 말을 내뱉지 못합니다. 설사 용기를 내 사직서를 냈다고 해도 지금 당장 갈 곳은 없습니다. 또 열심히 포트폴리오를 꾸미고 자기소개서를 쓰고 여기저기 문을 두드리고 하루 종일 긴장한 채로 면접을 보러 다녀야겠죠. 통장 잔고와 초초함은 반비례할 것이고 죽도록 싫었던 회사가 잠시 그리워질 때도 있을 겁니다.
기적적으로 저를 받아주는 곳이 있어서 첫 출근을 하면 그건 또 그거대로 힘들 겁니다. 새로운 조직원들과 컬쳐, 협업 툴, 보고 라인, 문서 양식에 적응하랴 수습기간 동안 잘리지 않기 위해 싫은 게 있어도 티도 못 내고 사람 좋은 웃음이나 샐샐 흘려야 합니다. 만약에 또 무(無) 직급으로 입사한다면 3년 차에 다시 레벨 0부터 시작해야 하는 좌절감까지 감당해내야 합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지금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귀여운 애교로 느껴지는 최면 효과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죠. ‘그동안 가슴속에 품고 다닌 사직서를 내기에 오늘의 힘듦은 시시하다’라고요.
Stranger than Paradise
앞서 설명한 이유 말고 한 가지 더, 제가 떠나가지 못하는 아주 커다란 이유가 남아있습니다. 그건 바로 천국인 줄 알고 들어간 다른 회사도 일주일만 지나면 지옥으로 탈바꿈할 거라는 자명한 사실 때문입니다. 파라다이스를 찾아 떠나 돌고 돌아 네 번째 회사에 정착한 지 약 일 년. 다음 회사라고 해서 뭐가 다를까요?
짐 자무쉬 감독의 로드 무비 <천국보다 낯선> (짐 자무쉬, 1984) 속 세 주인공 역시 돌고 돌아 천국을 찾아 나섭니다. 아메리칸드림에 부푼 세 청년은 ‘다음 정착지는 좀 낫겠지’라는 꿈을 안고 헝가리에서 뉴욕 다운타운, 클리브랜드를 이어 천국의 땅이라 불리는 플로리다까지 돌고 돌지만 현실은 거기서 거기입니다. 설상가상 좌절이 반복될수록 초반의 패기는 사라지고 점점 현실에 찌들어 예민함만 늘어갑니다. 마치 지금 제 모습 같군요. 몇 년 전까지는 나와 딱 맞는 직장이 어딘가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꿈도 희망도 없이 돈만 좇는 동태 눈깔 직장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찌들었다 할지라도 저의 여정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여정을 멈출 생각이었으면 잠도 못 자가며 사이드 프로젝트를 벌이지도, 자격증 공부를 하지도, 미친 듯이 깐깐하게 업무를 보지도 않았겠죠. 하지만 조금이라도 발전한 모습으로 떠나고 싶어서 있는 독기 없는 독기 여기저기서 다 끌어와 일을 벌입니다.
<천국보다 낯선> 속 세 주인공들도 여정을 준비하고 떠나는 그 순간만큼은 눈에서 빛이 납니다. 어딜 가든 그 끝은 똑같이 지겨울지라도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며 설레고 노력하는 모습이 싫진 않습니다. 현실에 안주해 피둥피둥 살찌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모습이 예뻐 보이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현실에 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도망칠 궁리를 하는 걸 보면 아직은 죽지 않았나 봅니다. 언젠가 멋지게 품 속 출사표를 던질 모습을 상상하며 시월을 놓아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