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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Jul 27. 2019

너의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행위의 의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루카 구아다니노, 2017)

To. 푸른 첫사랑의 성장통을 나누고 싶은 이들에게


푸르고 설익었지만 아름다운


 첫사랑을 떠올리면 푸른 필터가 머릿속에 저절로 장착됩니다. ‘푸르다’의 정확한 의미를 찾아보니


 1. 맑은 가을 하늘이나 깊은 바다, 풀의 빛깔과 같이 밝고 선명하다.
 2. 곡식이나 열매 따위가 아직 덜 익은 상태에 있다.


라고 나오는군요. 꽃을 피우고 열매는 맺었지만 설익어 어딘가 서툴고 부족한 상태에서 하는 사랑이 첫사랑이기에 그때의 기억은 푸른색으로 추억되나 봅니다. 짧고도 강렬한 사랑을 그린 영화는 주로 여름을 배경으로 합니다. 새파란 하늘 아래 젊은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고 마음을 미처 다 주지 못 한 채 헤어지고, 여름이 끝나면 열병 같은 사랑도 서서히 잊혀가죠.


 잠깐 제 첫사랑 이야기를 하자면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필름 카메라에 반사된 파란빛 같은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제대로 연애하는 법도 모르면서 무작정 좋아한다고,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하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같이 집으로 가고 남들 몰래 문자를 주고받으며 겨울을 보냈습니다. 뭐, 돌이켜 생각해보면 손을 잡을까 말까 옆 자리에 앉을까 말까 정도의 소꿉놀이였지만, 그렇기에 더 기억에 남고 풋풋해서 손발이 없어질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의 첫사랑 이야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루카 구아다니노, 2017)


 사랑의 찰나를 엮은 헤르만 헤세의 단편 모음집에서 첫사랑은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한 꽃이 라일락 노래를 불렀고, 다른 꽃은 푸른색 자장가를 불렀다. 그 꽃들 중 하나는 푸르고 커다란 눈을 가졌는데, 그것은 그의 첫사랑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마치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 꽃의 달콤한 향기 속에서 울려 퍼지듯 이린 시절 정원의 냄새를 풍기기도 했다. 또 다른 꽃은 그를 보고 웃으며 숨어 있는 붉은 혀를 기다랗게 내밀었다. 그는 강하고도 거친 송진과 꿀맛을 내는 그 기다란 꽃술을 핥았다.

『헤세, 사랑이 지나간 순간들』  헤르만 헤세 저/송영택 역, 문예출판사, 2017, 176pp.


엘리오의 풋풋함의 메타포로 등장하는 살구. 꽃말은 아가씨의 수줍음이다. 이하 이미지 출처: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루카 구아다니노, 2017)

 

꽃이 피고 진 뒤 열매가 열리고 설익을 시기가 오면 계절은 봄을 지나 초여름을 바라봅니다. 일 년 중 가장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기죠. 그리고 가장 향기롭고 색채가 뚜렷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아름답지만 모르는 것이 많고 완벽하지 않기에 첫사랑을 그 시기에 비유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이탈리아의 시골 별장을 배경으로 소년과 청년의 사랑을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유물 연구를 하는 아버지를 따라 여름 별장에서 여름을 보내게 된 ‘엘리오’와 아버지의 보조 연구원으로 온 ‘올리버’의 한 여름의 열병 같은 사랑을 담고 있죠.


오프닝 장면. 푸른 조각상 위로 휘갈긴 노란 글씨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이 영화 역시 푸른빛이 도는 화면과 노란 캘리그래피의 대비로 시작합니다. 아무 곳에서나 일시 정지를 누르고 장면에 쓰인 색깔들로 팔레트를 구성한다면 에메랄드, 코발트블루, 인디고, 라이트 아쿠아 같은 파란 계열의 색들로 가득 찰 정도로 이 영화는 푸른빛을 띠고 있습니다. 마치 제가 미처 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떠올릴 때와 같이 올리버를 회상하는 엘리오의 마음속에도 푸른 필터가 장착되어 있나 봅니다.






왜 ‘내 이름을 불러줘’가 아닌 ‘너의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인가

나의 입을 통해 확인하는 너의 존재


 퀴어 영화의 틀을 빌리고 있지만 제가 볼 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성장’입니다. 영화가 엘리오의 시점에서 엘리오의 감정을 더 많이 묘사하고 있는 만큼, 풋풋했던 엘리오가 올리버를 만나 여름을 보내며 진짜 사랑을 느끼고 계절이 지나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흔들거리고 거친 카메라 워크는 엘리오가 올리버에게서 느끼는 사랑과 두근거림, 혼란을 모두 담고 있죠.


 엘리오는 여름휴가 동안 모르는 남자와 방을 나눠 써야 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합니다. 그리고 어딘가 거만해 보이는 올리버의 태도가 웃긴 엘리오는 그의 말투 ‘나중에요.’를 따라 하며 비아냥거리죠. 그러나 올리버와 살이 맞닿는 순간마다 움찔하는 모습을 보이는 엘리오는 어딘가 부끄러워 보입니다. 올리버의 호의에도 퉁명스럽게 틱틱거리던 엘리오의 행동이 진짜 싫어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마음을 반대로 표현하는 사춘기 소년의 표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추측대로 올리버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담배를 사러 가거나 수영을 하거나, 서로의 관심사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올리버를 향한 엘리오의 마음은 깊어지고 흠모에서 사랑으로 변합니다. 엘리오가 마음을 여는 상징적인 장면은 아버지와 함께 바닷가로 가 고대 조각상을 건져 올리는 부분입니다. 엘리오는 조각상의 팔을 집어 든 올리버에게 악수를 청하며 “휴전할까요?”라고 말하죠. 엘리오에게 서슴없이 스킨십을 하고 관심을 보이는 올리버와 비교하면 엘리오는 아직 부끄러운가 봅니다. 그런 엘리오의 마음을 읽은 올리버는 조각상의 손으로 악수를 취하고 엘리오는 올리버에게 마음을 열게 됩니다.



 엘리오는 별장에서 만난 여자 아이와 데이트를 하는 사이지만 정말 사랑해서라기 보다는 여름 방학 동안의 일탈 정도로 생각하며 진지한 태도로 그녀를 대하지 않습니다. 반면 올리버와는 같은 집에서 지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올리버와 아버지의 연구 이야기, 엘리오의 피아노 연습 이야기를 하며 정신적인 교류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둘 만의 시간이 늘어나며 육체적인 교류까지 이어질락 말락 하지만 이성의 끈을 놓지 않는 올리버 때문에 미묘한 감정의 줄다리기가 이어지죠.







 두 사람의 교류의 절정은 어느 날 자정에 이뤄집니다. 모두 잠든 밤, 올리버는 자기의 방으로 엘리오를 초대하고 성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뒤 엘리오에게 이렇게 말하죠.


네 이름으로 날 불러줘. 내 이름으로 널 부를게.


"Call me by your name and I'll call you by mine."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변증법을 수사법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에 적용시켜 생각합니다. 변증법이란 ‘정 (正), 반 (反), 합(合)’(테제, 안티 테제, 진 테제라고도 합니다)의 과정을 통해 세상의 형성, 발전, 변형을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먼저 수많은 의문과 모순을 가진 ‘정’이 존재한다면, 그와 반대되는 ‘반’의 존재를 만나 내 안의 의문점을 자각하고 풀어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마지막에 정과 반이 만나 새로운 ‘합’이 탄생하는 것이지요.


 엘리오는 성장이 모두 이뤄지지 않은 미성숙한 소년입니다. 성적 호기심은 왕성하지만 정체성을 찾지 못한 상태죠. 마음속에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여러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한 그의 앞에 청년 올리버가 나타납니다. 올리버는 엘리오에 비해 몸도 마음도 행동도 성숙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부끄러워 자기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는 엘리오에 비해 올리버는 정확하고 직접적으로 생각을 표출할 줄 아는 사람이죠. 엘리오가 ‘정’의 상태라면 올리버는 ‘반’의 성격을 띱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교감을 통해 ‘합’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마음속에 소란과 의문을 안은 채 서로 다른 지점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대화와 교감이 그들을 엮어 ‘사랑’이라는 관계의 발전을 이뤄냈죠. 새롭게 싹튼 감정 덕분에 두 사람은 ‘너는 너, 나는 나’의 단계를 뛰어넘어 ‘네가 나고, 내가 너’인 관계가 되었습니다. 엘리오와 올리버의 마음속에서 서로를 규정하는 표현은 셀 수 없을 겁니다. 그중에서도 이름은 가장 알기 쉽게 서로를 정의할 수 있는 기호입니다. 그래서 올리버는 섹스 후 침대 위에서 본인을 엘리오라고 불러달라고 한 게 아닐까요? 내 눈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의 형태를 확인하고, 그이의 입을 통해 서로가 한 몸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슬픔, 그 괴로움 모두 간직하렴. 네가 느꼈던 기쁨과 함께”

첫사랑의 열기가 식은 뒤


 여름 방학은 끝을 향해 달리고 있고, 올리버가 떠나기 전 두 사람은 짧은 기차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여행이 끝난 뒤 홀로 남은 엘리오는 무너질 듯한 표정을 한 채 집으로 돌아옵니다. 첫사랑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아파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런 말을 건네죠.



-지금은 아무 감정도 느끼고 싶지 않겠지. 다시는 어떤 감정도 느끼고 싶지 않다거나. 그리고……  나와 나누고 싶지 않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네가 가졌던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다. 너희 우정은 정말 아름다웠어. 우정 이상이었지. 네가 부럽다. 보통 부모들이면 없던 일로 하고 아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길 빌겠지만 난 그런 부모가 아니야.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려고 마음을 잔뜩 떼어 내다간 서른쯤 되었을 땐 남는 게 없단다. 그럼 새로운 인연에게 내어줄 게 없지. 그런데 아프기 싫어서 그 모든 감정을 버리겠다고? 너무 큰 낭비지. 주제넘은 말이었니? 그럼 하나만 더 이야기 하마. 이 얘긴 좀 편할 거다. 나도 기회는 있었지만 너희와 같은 감정은 못 가져봤어. 늘 뭔가가 뒤에서 붙잡았지. 앞을 막아서기도 하고. 어떻게 살든 네 소관이지만 이것만 명심하렴. 우리 몸과 마음은 단 한 번 주어진단다. 그런데 너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닳아 해지고 몸도 그렇게 되지.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는 시점이 오고 다가오는 이들이 훨씬 적어진단다. 지금의 그 슬픔, 그 괴로움 모두 간직하렴. 네가 느꼈던 기쁨과 함께.






 첫사랑이 해외로 떠나야 돼서 공항에서 배웅해주던 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함께했던 한 달은 참 순식간에 지나가더군요. 그 뒤로도 연락을 하며 지냈지만 장거리 연애는 힘든 것 같습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던 때에 헤어졌고 그때도 펑펑 울었습니다. 그다음 사랑이 끝날 때도 무뎌지기는커녕, 마음이 시리게 아프지만 극복하고 일어서는 좋은 방법은 그 아픔을 충분히 느끼는 것 이더군요.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추억을 잊는다면 짧은 여름 애써 수면 위로 끌어올렸던 소중한 유물들은 다시 바닷속 깊이 가라앉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남이 되고, 남이 내가 되어 느낄 수 있었던 감정도 사라져 버립니다. 엘리오는 올리버와 나눴던 정신적 교류를 통해 사랑을 배우고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고 난 뒤의 부재가 얼마나 크고 아픈지를 깨달으며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올리버가 떠난 후 당장 마음이 아프다고 좋았던 추억까지 묻어버린다면 모두 무용지물이 되죠.


 성장통이 없어진다면 성장 또한 멈춥니다. 엘리오 아버지의 말처럼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려고 억지로 마음을 떼어내 버리면 남는 것은 없습니다. 첫사랑이 끝나 아프더라도 아플 땐 처절하게 아프고 눈물 뚝뚝 흘리다 보면 어느새 계절은 지나갑니다. 다음 계절엔 그 아픔이 무뎌질 정도로 성장한 자신을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From. 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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