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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Jul 21. 2019

바닐라 스카이 속 실존주의 철학이 던지는 선택의 중요성

<바닐라 스카이> (카메론 크로우, 2001)

To. 현실로부터 도망쳐 눈을 감고 싶은 이들에게


무의식이 만들어 낸 달콤한 꿈속 세상


 매일 잠만 자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만성피로 때문인지 마음의 감기 때문인지 원인은 모르겠지만 하루 24시간 중 18시간 이상 눈을 감은 채 보냈습니다. 잠에 들면 꿈을 꿉니다. 꿈은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악몽을 꾸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깨고 싶지 않은 달콤한 내용이었습니다. 뒷이야기가 궁금해 다시 잠에 들어 무의식 속 세계를 돌아다니는 일이 퍽 재미있었습니다. 현실보다 제가 만들어 낸 가상의 세계가 더 매력적이었거든요.


 꿈속 주인공은 접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됩니다. 저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된 마냥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제 정수리, 옆얼굴, 뒤통수를 바라보며 꿈을 꿉니다. 나의 내면 속 생각은 물론, 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저의 통제하에 있습니다. 원하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 현실과는 정반대였죠. 꿈속에서 저는 하고 싶은 일에 종사하는 멋진 사람이자 사랑받는 여자이며, 생글생글 웃는 밝은 아이였습니다.


 눈을 뜨면 깜깜한 천장이 제일 먼저 보입니다. 핸드폰 액정을 확인하면 오후 대여섯 시쯤. 침대에서 기어 내려오지만 과다 수면에 취해 힘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머리도 멍하고 미지근한 두통이 밀려옵니다. 샤워를 했을 뿐인데 힘이 없어 눈앞이 핑 돕니다. 아무 음식이나 입에 넣은 뒤 거울을 보면 참 가관입니다. 방금 전까지 꿈속에서 멋진 옷을 입고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던 나는 어디 가고, 띵띵 부은 얼굴을 하고 냄새나는 잠옷을 입은 제가 서 있습니다.


 뭔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런 나 자신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워 제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이 의지를 꺾습니다. 기껏 일어나 정신을 차렸지만 자기혐오에 빠져 괴로워하다가 ‘이런 생각을 할 바에 차라리 잠을 자자’라고 현실도피를 자기 합리화하고 다시 잠을 청했습니다.






바닐라 빛 하늘 아래 펼쳐지는 자각몽

<바닐라 스카이> (카메론 크로우, 2001)


바닐라 스카이: 흔히 볼 수 없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후 2시경의 하늘. 인상파 화가 모네의 그림 속 풍경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모습을 뜻하기도 한다.  


<아르장퇴유의 센 강 >  클로드 모네, 1873, 유화. 이 그림은 영화 속에서도 등장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영화 속 주인공 ‘데이비드'는 젊고 권력을 가졌으며 부유합니다. 이성에게 인기 많은 그에게 사랑은 가벼운 장난일 뿐입니다. 모든 남성의 로망 ‘줄리’와 만나고 있지만 데이비드에게 그녀는 섹스 파트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과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던 데이비드가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파티에서 만난 친구의 애인 ‘소피아’에게 반한 데이비드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마음을 열고 진짜 행복이 어떤 것인지 맛보게 되죠.


데이비드의 집을 둘러보다 눈에 띈 모네의 그림을 마음에 들어하는 소피아. 대화를 통해 둘은 점점 가까워진다. 이하 이미지 출처: 영화 <바닐라 스카이> (카메론 크로우, 2001)


 이 사실을 알게 된 줄리는 배신당했다는 분노에 휩싸여 데이비드를 차 조수석에 태운 채 자살 시도를 합니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차는 다리 아래로 곤두박질합니다. 그 사고로 인해 줄리는 사망하고 데이비드는 얼굴과 다리에 끔찍한 치명상을 입게 되죠.



 이 사고는 부, 명예, 사랑 무엇 하나 빠질 게 없던 데이비드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습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얼굴이 붕괴된 그는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립니다. 사람들의 눈초리를 견뎌야 하는 것은 물론, 사장의 부재를 노려 이때다 싶어 잡지사를 인수하려는 위원회와의 긴 싸움, 틀어진 인간관계……. 맨 정신에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엎친 데 덮친 격 벌어집니다.






*여기서부턴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분마다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Every passing minute is another chance to turn it around. 


 <바닐라 스카이>는 이런 절망의 구렁텅이 같은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데이비드가 내린 선택대로 흘러가는 영화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실 것 같나요? 명예와 외모가 행복의 필수조건은 아니지만 충분조건 정도는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한 순간에 모두 잃게 되고 느끼는 상실감은 상상을 초월할 겁니다. 만약 제가 데이비드라면 현실을 외면했을 것입니다. 편지 초반에서 고백했듯이 저는 외부의 충격에 그리 강하지 않기 때문이죠. 안 그런 척 마음속에 단단한 벽을 쌓고 살지만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 가해지면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그래서 그런 상황이 온다면 버티지 못하고 잠에 빠져 사는 선택을 할 것입니다.


소피아와의 현실 도피라는 선택을 하는 데이비드


 데이비드의 선택도 그러합니다. 영화 중반 망가진 얼굴을 하고 다시 소피아를 만나러 간 데이비드. 하지만 땅을 친 자존감과 사고 후유증 때문에 만남은 흐지부지 끝나버리고 술집에서 나온 그는 땅바닥에서 잠이 듭니다. 다음 날 깨어난 데이비드의 눈 앞에는 소피아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어제저녁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냉정하게 돌아선 그녀가 데이비드를 부축해서 들어가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남을 이어갑니다. 데이비드와 소피아가 길거리를 걸어가는 장면에서 하늘은 말 그대로 바닐라 스카이처럼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색채를 뽐냅니다. 마치 데이비드와 소피아가 좋아하는 모네의 그림처럼 말이죠. 영화의 제목이 <바닐라 스카이>인 만큼 이 장면은 이야기의 큰 전환점을 상징합니다.






 실은 소피아와 헤어지고 난 다음 날 데이비드는 생명연장 회사 ‘LE’를 찾아가 150년간 냉동인간 상태로 자각몽 속을 살아가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꿈의 내용은 모두 데이비드와 회사가 상의하여 설계한 것 이기 때문에 그가 원하는 대로 이뤄집니다. 자각몽의 시작은 잠에서 깨어 바닐라 스카이 아래를 걷는 시점부터 입니다. 데이비드는 소피아와 함께 살며 사랑을 속삭이고 저명한 성형외과 의사에게 수술을 받아 얼굴 복원에도 성공하죠.


죽은 줄리의 얼굴을 하고 자신을 소피아라고 말하는 모습에 혼란을 느낀다.


 그러나 현실 도피라는 선택을 해 행복한 꿈을 꾸는 것도 오래가진 못 합니다. 자동차 사고가 있던 날 사망한 줄리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꿈속에서 소피아와 줄리의 모습이 교차되어 나타나기 때문이죠. 누가 소피아이고 누가 줄리인지 혼란스러운 데이비드의 정신 때문에 꿈 역시 꼬이고 꼬이게 됩니다.






실존주의 철학이 던지는 메시지: 선택의 중요성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실존주의 철학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가 실존주의 사상과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실존주의란 현대 철학 개념으로 인간 존재와 인간의 현실적인 의미를 그 구체적인 모습에서 다시 파악하고자 하는 사상입니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삶을 유한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불안정하다고 볼 수 있죠. 여기까지만 보면 굉장히 비관적인 사상처럼 느껴지지만, 한 가지 더 중요한 주장이 있습니다. 바로 ‘선택’의 중요성이죠. 우리는 불안정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더 선택에 신중하고 시간을 헛되이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자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하기 위한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실존주의는 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요, 제가 좋아하는 알베르 카뮈도 그 영향을 이어받았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서 그는 인간이란 저항하는 존재라고 표현합니다. 현실이 아무리 부조리하더라도 외면해서는 안되며, 맞서 싸우는 것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며, 무거운 돌멩이를 절벽 위까지 메고 올라가 봤자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 일을 반복하는 시지프의 모습이야 말로 인간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좋은 예시라고 합니다.


그림자 없는 햇빛이란 없기에 밤을 겪어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조리한 인간의 대답은 긍정이며 그의 노력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운명은 있어도 초월적인 운명이란 없다. 혹 있다면 오직 숙명적이기에 경멸해야 할 것으로 판단되는 단 한 가지 운명이 있을 뿐이다. 그 외의 어떤 것에 관한 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살아가는 날들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 인간이 그의 생활로 되돌아가는 이 미묘한 순간에 시지프는 자기 바위를 향하여 돌아가면서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 행위들의 연속을 응시한다. 이 행위들의 연속은 곧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자신의 기억의 시선 속에서 통일되고 머지않아 죽음에 의해 봉인될 그의 운명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적인 모든 것은 완전히 인간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보고자 원하되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장님인 시지프는 지금도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바위는 또다시 굴러떨어진다.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저/김화영 역, 책세상, 1997, 188pp.






“진짜 인생을 살고 싶어. 이제 꿈꾸고 싶지 않아.”

I want to live a real life. I don’t want to dream any longer. 


 소피아는 데이비드에게 “1분마다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데이비드는 꿈으로의 도피라는 선택을 해 행복한 한 때를 보내지만 현실을 외면한 선택은 절대 영원한 달콤함을 주지 않습니다. 일이 꼬여버리자 데이비드는 기억을 더듬어 생명연장 회사 LE 본사에 찾아가죠. 그리고 회사 옥상에서 데이비드의 꿈을 조정하는 기술 담당자와 대면합니다.


"The sweet is never as sweet without the sour."


 기술 담당자는 작은 오류들을 수정한 후 자각몽에 빠질 것인지, 아니면 현실로 돌아갈 것 인지 데이비드에게 다시 선택의 기회를 줍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이죠. “하지만 기억하세요. 미래에도 신맛을 모른다면 단맛을 느낄 수 없는 법.” 방금 인용한 카뮈의 문장 중 “그림자 없는 햇빛이란 없기에 밤을 겪어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와 비슷한 메시지를 품고 있지 않나요? 마치 데이비드에게 ‘달콤한 꿈에 취해 살다가는 달콤함에 몸이 마비가 될 수 있으니 적당히 현실로 돌아가라’고 설득하는 것 같습니다.


"I don't want to dream any longer."


 데이비드가 결정을 내리기 전 마지막으로 기술 담당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에게 있어 행복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데이비드는 “진짜 인생을 살고 싶어. 이제 꿈꾸고 싶지 않아.”라고 대답하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선택을 합니다.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기 위해 뛰어내린 데이비드의 눈 앞에 행복했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갑니다.






“눈을 뜨세요”

Open Your Eyes


 그리고 데이비드는 길고 긴 자각몽에서 깨어나 눈을 뜹니다. 냉동 인간 상태에서 깨어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몇 년 동안 잠들어 있었는지도 모르고 미래로 간다고 해서 죽은 연인이 살아나거나 얼굴이 원상 복귀되는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맛이 나는 현실 안에서 달콤함을 찾기 위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현실로 돌아와 눈을 뜨는 데이비드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화가 끝난다.


 이 영화를 본 건 며칠 전인데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내내 약 일 년 동안 잠에 빠져 살던 시절이 떠올라 부끄러웠습니다. 그 후에야 뭐 공항 근무하랴 귀국 준비하랴 한국 돌아와서는 이것저것 일 벌이느라 바빴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날아가 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더군요. 그때 꿈속으로 도피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뭔가 나아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고 실존주의는 현명한 선택을 하여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고 말합니다. 아무런 발전 없는 신세 한탄을 하는 것도 실존주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걸지 모릅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하는 수많은 선택이 우리의 시간과 인생 전체를 어떻게 바꿔 놓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From. 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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