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 스팍스> (조나단 데이턴/발레리 페리스, 2012)
To. 사랑하는 존재를 소유하고 싶은 이들에게
요즘 들어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맞추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렇게 피곤하게 살 바에야 사람들을 입맛대로 조종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자기중심적인 생각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타인이 아주 사소한 습관에서 성향적인 것까지 많은 것을 본인에게 맞춰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게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세상 속에 갇혀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독립적인 게 아니라 이기적인 것일 뿐입니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소설가 '멜빈'은 보도블록의 경계선은 절대로 밟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캐롤'을 만나 사랑이란 감정을 배우고 자기만의 세상을 깨고 나오게 됩니다. 멜빈이 바닥의 경계선을 밟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적당히 양보하고 이해하고 맞춰가는 게 사람 사는 것이라고 넌지시 말해줍니다.
서로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 위해선 적당한 밀고 당기기와 진심 어린 조언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이유로 남을 구속해버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는 걸 모른 채 말이죠. 사랑하기 때문에 본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원하는 대로 입고 먹고 말하고 생각하고, 또 모든 행동을 함께 하길 바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동시에 가끔은 혼자만의 공간에서 휴식을 취할 권리를 뺏는 행위이기 때문이죠. 이는 연인, 친구, 동료 사이에서는 물론 부모 자식 사이에서도 해서는 안 될 가학 행위입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남이 나에게 모든 걸 맞추길 바라며 상대방의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사랑의 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의 행위 역시 소유 양식으로 말해지는가 존재양식으로 말해지는가에 따라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사랑을 소유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면 사랑은 아마도 하나의 사물, 획득하고 소유할 수 있는 어떤 실체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랑”이라는 사물은 없다. “사랑”이란 추상적 개념으로서, 여신(女神)이라든가 어떤 이질적인 존재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껏 그것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뿐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생산적인 활동이다. 사랑이란- 그 대상이 인간이든 나무이든 그림이든 어떤 이념이든 간에-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배려하고 알고자 하며, 그에게 몰입하고 그 존재를 입증하며 그를 보고 즐거워하는 모든 것을 내포한다. 그것을 그(그녀 또는 그것)를 소생시키며 그(그녀 또는 그것)의 생동감을 증대시킨다. 사랑은 소생과 생장을 낳는 과정이다.
그러나 소유 양식으로 체험되는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구속하고 가두며 지배함을 의미한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생명감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목을 조여서 마비시키고 질식시켜서 죽이는 행위이다.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저/차경아 역, 까치, 1996, 73pp.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소유 양식이란 무언가를 이루는 외적인 것에 집착하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자면 나라는 사람을 수식해주는 직업, 부동산, 사유 재산, 감투 등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그것들에 목말라하는 상태죠. 사랑으로 치환해 생각해보면 사랑하는 이의 존재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몸, 정신, 매력 등을 내 옆에 두고자 하는 상태입니다. 이 책에 나온 비유를 인용하자면 길가에 핀 아름다운 꽃을 꺾어 생명을 앗아 자기 옆에 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반대로 존재양식이란 지금 여기, 그리고 모든 것이 다 떠나고 남은 나라는 발가벗은 알맹이에 집중하는 정신입니다.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가져야 행복할까 보다 어떻게 해야 행복할까 고민하고, 사랑에 있어서도 강가에 핀 꽃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먼발치서 바라봐도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상태죠.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에리히 프롬은 존재를 중요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루비 스팍스> (조나단 데이턴/발레리 페리스, 2012)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소설 속 인물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까요? 더더군다나 본인이 쓴 소설 속 주인공을 사랑하게 된 거라면 말이죠. 영화 <루비 스팍스>는 베스트셀러 작가 ‘캘빈’이 자신이 쓴 연애 소설 속 주인공 ‘루비 스팍스’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얼핏 보면 소설 속 인물이 종이를 뚫고 나와 현실 세계에서 좌충우돌하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 분류될 수 있지만 사랑을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소유와 존재의 관점에서 풀어낸 작품이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영화를 만든 두 감독과 남녀 주인공이 실제 연인 사이라는 점입니다. 또 각본을 쓴 건 루비 스팍스 역을 맡은 ‘조 카잔’입니다. 저는 ‘실제 연인들이 영화라는 틀을 빌려 서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넌지시 건네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서로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사랑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를 죽이는 것과 똑같은 행위라는 것입니다. 소설가 캘빈이 쓴 소설 속 등장인물 루비 스팍스에게는 자아가 없습니다. 캘빈의 상상에 의해 창조된 존재로, 종이 위에 존재하는 검은 활자의 집합체일 뿐이죠. 루비의 실체는 눈으로 볼 수 없으며 오로지 캘빈이 머릿속에서 그가 묘사한 언어로 입고 먹고 행동하는 꼭두각시 같은 존재입니다. 여기서 감독과 각본가는 발칙한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만약 루비 스팍스가 소설을 찢고 현실 세계로 튀어나오게 된다면?’이라는 상상을 말이죠.
어느 날 캘빈은 자기 집 부엌에 와이셔츠만 입은 채 서 있는 루비 스팍스와 대면합니다. 외모나 성격, 성장 배경은 그가 소설에서 묘사한 대로이지만 이제 그녀에게는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아가 생겼습니다. 루비 스팍스가 소설 속 인물이었을 때는 캘빈이 일방적으로 그녀를 소유하고 (나쁘게 말하면) 지배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녀가 현실로 걸어 나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가 되고 나서는 얘기가 달라져야 하지만 캘빈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페라의 유령>에서 극단 무용수였던 ‘크리스틴’을 프리마 돈나로 만들어준 유령이 그녀에게 병적인 집착과 사랑을 품는 것처럼 캘빈도 자신이 창조한 완벽한 이상형 루비 스팍스를 소유하려 듭니다. 이미 그녀는 소설에서 빠져나와 그와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캘빈은 자꾸 그녀를 소설 속 언어로 통제하려고 하죠. 완벽한 이상형이 눈 앞에서 사라지는 게 두려워서 인 걸까요? 캘빈은 루비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취미 생활을 즐기는 것도 탐탁지 않게 생각합니다. 캘빈의 세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즐기려는 루비와 새장 속 새처럼 그녀를 가두려는 캘빈의 갈등은 점점 심각해집니다.
종이 위에서 만큼은 루비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기 때문에 캘빈은 다시 타자기 앞에 앉아 그녀의 성격을 개조하기 시작합니다. 무조건 그에게 의지하고 그만을 바라보는 무기력한 존재로 말이죠. 24시간 내내 붙어있는 그녀에게 부담을 느끼게 되자 다시 책상 앞에 앉는 캘빈. 그가 쓰는 대로 루비는 의존증 있는 사람이 됐다가, 아주 독립적인 사람이 됐다가, 하루 종일 웃는 미친 사람이 됐다가, 사소한 일에 화내고 우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당혹스럽기만 한 루비는 정신병이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죠. 소유하고자 하는 자와 벗어나려는 자 사이에서 갈등은 점점 심각해지고 캘빈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그녀를 조종하기까지에 이릅니다. 두려움에 빠져 도망치는 루비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린 캘빈은 ‘그녀는 자유의 몸이 됐다’라는 문장으로 소설을 끝맺고 루비를 놓아줍니다.
언어는 소유 지향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인자(因子)이다. 사람의 이름- 우리는 누구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탈개인화 추세가 지속된다면 얼마 안 가서 필시 번호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은 그것이 불멸의 본질이라는 그릇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름은 그 사람과 동일시된다. 한낱 스쳐가는 과정일 뿐인 이름의 주인공을 불후의 영속적 실체라는 듯이 전시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보통명사도 이와 똑같은 기능을 한다. 사랑이며 긍지, 증오나 기쁨 같은 말들이 확고한 실체인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 실체의 배후에는 이렇다 할 실재(reality, Realität)가 없다. 그 말들은 단지 우리가 그것을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과정으로 통찰하는 현실을 애매하게 흐려놓을 뿐이다. “책상”이나 “램프”처럼 사물을 지칭하는 명사들조차 혼란을 초래한다. 물질명사는 우리에게 암시를 걸어서 그것이 고정된 실체라고 말하게 말한다.
Ibid, 120-121pp.
루비와 캘빈은 물론 두 사람의 사랑은 정확한 언어로 정의할 수 없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이 세상의 존재하는 것들은 이름과 보통 명사라는 가면을 쓰고는 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편의상 붙인 단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보고 싶은 마음의 상태를 ‘사랑’이라고 부르게 됐을 뿐, ‘소금’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해 대신 ‘소금해’라는 애정 표현을 하고 있을 겁니다.
이렇듯 언어는 실재를 부르기 쉽게 붙이는 이름표 같은 역할을 할 뿐, 언어로 모든 것을 정의하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영화 <루비 스팍스>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은 결코 문장 따위로 규정할 수 있는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비록 이름이나 형용사로 서로의 특징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그 뒤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은 무의식과 강한 자아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런 생생한 존재를 정적인 언어로 통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루비를 떠나보내고 난 뒤, 산책을 하던 중 캘빈은 우연히 그녀와 다시 만납니다. 거짓말 같이 캘빈이 소설 속에서 만들어냈던 첫 만남과 똑같은 상황이 현실에서 벌어지죠. 공원에서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와의 대화가 루비에게도 데자뷰처럼 느껴지지만 이전의 기억은 리셋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처음 만난 캘빈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데요, 서로가 싫어진 두 연인이 기억을 지우려 발버둥 쳐도 돌고 돌아 다시 서로에게 돌아가는 <이터널 선샤인>의 마지막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진전될지는 모르겠지만 친구가 되든 애인이 되든 서로를 속박하지 않고 존중하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루비 입장에서 글을 쓰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속박하고 소유하려는 게 얼마나 나쁜 행위인지 조목조목 쓰겠다는 생각으로 노트북 앞에 앉았는데, 쓰다 보니 캘빈에게서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최근에 피곤하고 지쳤던 이유는 남들이 저를 소유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저에 맞추려고 억지를 부려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피해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제가 영화 속 캘빈처럼 말 몇 마디로 상대를 단정 짓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상대방 역시 자유로운 존재로 존중해주고 꽃을 꺾듯 소유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봐주는 것이 사랑인데 말이죠.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정작 저는 사랑을 소유하려고 했던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리는데요, 조금은 부드럽게 관계를 이어 가는 방법을 배워야겠습니다.
From. 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