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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May 18. 2019

아프고 외면하고 싶은 기억에 고통받고 있나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실뱅 쇼매, 2013)

To. 외면하고픈 기억에 얽매여있는 이들에게


진짜 나를 찾아 나서기 위한 통과 의례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실뱅 쇼매, 2013)


 주인공 ‘폴’은 서른세 번째 생일을 맞이했지만 정신은 유년기에 머물러 있는 ‘어른 아이’입니다. 두 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말을 잃었고, 두 이모가 운영하는 댄스 교습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며 먹고살고 있죠. 두 이모도 그를 어린아이 대하듯 합니다.


서른세 번째 생일 파티에서 그를 축하해주는 건 이모들의 지인뿐. 이하 이미지 출처 :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실뱅 쇼매, 2013)


 악몽에서 깬 폴은 샤워를 하고 두 이모의 댄스 교습소에서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피아노를 칩니다. 가끔씩 공원으로 산책을 가긴 하지만 항상 이모들의 넘치는 보호와 걱정을 받습니다. 이모들이 준비한 서른세 번째 생일 선물인 부모님의 사진을 본 폴의 눈시울은 붉어집니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선 사진을 두 조각으로 잘라 엄마의 모습만을 간직하려 하죠. 갓난아기 폴이 기억하는 엄마는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주는 천사의 모습이지만 아빠는 괴팍하기 그지없습니다. 과연 이 기억은 사실일까요? 아니면 왜곡된 기억이 폴의 무의식에 자리 잡아 그를 지금까지 괴롭히는 것일까요?


나쁜 기억을 도려내 외면하려는 폴의 모습


 영화는 폴이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담 프루스트’의 도움을 얻어 자신이 알아야 할 사실을 직면하고, 진정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서는 성장기를 담고 있습니다. 왜곡된 기억 때문에 고통받거나 정말로 원하는 일을 찾지 못 한 어른들을 위한 성장 동화라고 할 수 있네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으로 보는 개성화

 

칼 구스타프 융은 ‘개성화 (individuation)’라는 개념을 통해 내적 성장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개성화는 전인적인 자아상을 깨닫는 과정이다. 각자의 무의식에 잠자고 있는 수많은 열망과 상처를 전부 의식으로 통합할 때까지, 평생에 걸쳐 계속되는 내면의 사고 과정이다.

『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지음, 아르테, 2015, 134pp.


 위에서 언급한 폴의 모습은 아직 개성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부화 전의 애벌레 같습니다. 폴의 개성화를 방해하는 것들은 1. 이모들의 과잉보호와 2. 두 살 때 부모님을 잃은 아픈 기억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폴의 내적 성장을 막고 있어 그는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정말로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 한 채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연히 발을 들인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덕분에 폴은 아픈 상처를 치유하고 자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힘을 얻습니다.


인간의 무의식에는 자신의 총체적 인간상에 대한 청사진이 있는데, 개성화란 무의식의 가능성을 최대한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림으로써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청사진을 실현하는 길이다.

Ibid


폴의 개성화를 도와주는 치료제, 허브티 한 잔과 마들렌.


 폴은 우연히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담 프루스트의 방 안에 비밀의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법의 심리 테라피를 위한 곳이자 주 치료제는 허브티 한 잔과 마들렌. 옛 기억을 상기시키는 추억이 담긴 물건을 들고 가 50 유로를 내고 마담 프루스트가 주는 차를 마시면 과거의 기억들이 플래시백처럼 펼쳐집니다.






“기억은 물고기처럼 물속 깊숙이 숨어 있단다.”


"네 엄마는 여기 있어. 네 기억의 뿌연 물속에..."


 마담 프루스트는 무의식 속 옛 기억을 회상하는 일을 낚시에 비유합니다. 폴에게 엄마는 무의식 속 심연에 가라앉아 있으며 그걸 끌어올리는 것은 폴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다고 말하죠. 그리고 차 한 잔을 건네며 그가 직접 진실과 부딪히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차와 마들렌이 촉진제가 되어 갓난아기 때의 기억과 마주하는 폴. 마담 프루스트의 말이 진짜라는 것을 믿게 된 폴은 매주 목요일마다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지며 개성화에 한 발자국 다가갑니다.


 한편 폴과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만남을 알게 된 이모들은 노발대발하며 그녀의 집을 난장판을 만듭니다. 폴은 우리가 지킬 거라고, 뺏어갈 수 없다고 소리치며 말이죠. 비밀 정원은 엉망이 됐고 마담 프루스트는 아파트를 떠나지만 폴을 위해 허브티와 마들렌을 남기고 갑니다.


"나쁜 기억은 행복의 홍수 아래 가라앉게 해. 네게 바라는 건 그게 다야. 수도꼭지를 트는 건 네 몫이란다."


  마담 프루스트란 조력자가 나타난 덕분에 폴은 직접 옛 기억을 회상하며 개성화를 이룰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는 법. 개성화를 위한 마지막 기억 낚시는 누구의 도움 없이, 오롯이 폴 혼자의 힘으로 이뤄집니다. 가장 중요한 미끼는 ‘Attila Marcel’. (영화의 원제이기도 합니다.) 부인을 패는 남자에 관한 노래 제목이며, 폴의 아빠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상기시키는 촉매제이며 그만큼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데요, 폴은 노래가 실린 레코드판을 사서 기억 회상에 들어갑니다.






*여기서부턴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Attila Marcel Face B.

왜곡된 기억 바로잡기



 폴이 기억하는 아빠는 괴팍하고 엄마를 때리기까지 하는 프로 레슬러입니다. 그렇기에 폴은 아빠에 관련된 것이라면 상자 깊숙이 넣어 놓고 외면한 것이죠. 아빠에 관한 기억을 바로잡는 것이 폴의 정신적 성장의 첫 단계가 되겠습니다.


아빠를 떠올리게 하는 메타포를 마주하는 순간 오해가 풀리고 폴은 개성화에 한 발짝 다가간다.


 피아노 앞에 앉은 폴. 차를 마신 뒤 아틸라 마르셀 페이스 B가 흘러나오자 기억 여행이 시작됩니다.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링 위에서 레슬링을 벌이는 부모님의 모습. 아빠가 엄마를 폭행하는 듯 보이지만, 두 사람은 행복한 표정으로 춤을 추고 엄마의 승리로 끝납니다. 두 사람이 레슬링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고 폭행했다는 것은 갓난아기 눈에 비친 착각이었습니다. 단지 레슬링 연습을 했을 뿐, 아빠는 엄마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홀로 마주한 옛 기억 덕분에 아빠에 관한 오해가 풀리고 폴은 찢어 놓았던 부모님의 사진을 테이프로 붙인 뒤 피아노 콩쿠르에 참여하는데요, 무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진실을 깨닫고 마음을 치유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해가 풀린 폴은 무표정으로 댄스 교습소에서 반주를 할 때와는 다르게 피아노와 혼연일체가 되어 연주를 하고 우승 트로피를 거며 쥡니다.






Attila Marcel Side A.

네 인생을 살아라


폴의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제목이자 폴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


개성화는 ‘나는 다른 사람과 똑같아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다. 다른 사람에게 뒤질까 봐, 다른 사람을 이길 수 없을까 봐 조바심을 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로서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다.

Ibid, 135pp.


 폴의 정신적 성장, 개성화의 두 번째 단계는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입니다. “어느 쪽도 원치 않아요. 내 아들은 자기 뜻대로 살 거예요.”라고 노래한 엄마의 소망과는 반대로, 폴은 두 이모들의 과잉보호 밑에서 자라며 그분들의 뜻대로 살고 있습니다. 인종 차별, 계급 차별을 서슴지 않는 두 이모들은 폴을 고상하게 키우기 위해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게 합니다. 무미건조하게 댄스 교습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는 것이 과연 진실로 폴이 원하는 삶이었을까요?


 우승 뒤 축하 파티에서 폴은 아틸라 마르셀 페이스 A로 마지막 기억 여행을 떠나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됩니다. 집 안에서 부모님과 폴은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굉음이 울리더니 한 순간에 천장이 무너지고 부모님은 피아노 밑에 깔려 죽게 되는데요, 올려다보니 아연실색한 젊은 두 이모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너무 끔찍해서 잊고 싶었던, 감추고 싶었던 사고.


 폴의 부모님은 부실 공사로 인해 피아노의 하중을 견디지 못한 천장이 무너지며 사망했고, 이모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폴에게 고상한 길을 걷게 하기 위해 억지로 피아노를 시켰던 것이죠. 더 이상 부모님을 죽게 한 피아노를 치고 싶지 않은 폴은 건반 뚜껑으로 손가락을 내리치고, 스스로 피아니스트로서의 길을 걷길 포기합니다.


 이모들의 기준에 맞춰 선택의 자유 없이 살아온 폴은 삼십삼 년이란 인생에서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섭니다. 피아노 대신 마담 프루스트가 남기고 간 우쿨렐레로 수업을 여는가 하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며 말이죠.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덕분에 아빠에 대한 오해가 풀렸고,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것을 계기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날 용기가 생긴 폴. 더 이상 폴은 어른 아이가 아닙니다. 당장은 눈물이 흐를지언정 아픔과 마주하는 용기와 인생을 개척할 줄 아는 힘을 가진 진짜 어른이 된 것입니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살던 폴이 자신의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Papa”라고 말하는 마지막 장면은 폴의 성장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Vis ta vie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때론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기억은 주관적입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몬>이 보여 주듯이,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각자의 기억은 제각각이며 무엇이 진실인지 알기 어렵죠.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비슷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를 괴롭히는 나쁜 기억은 우리가 만들어 낸 괴물일지도 모릅니다. 그 ‘기억’이 우리를 괴롭힌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착각과 오해가 우리를 괴롭히는 걸 수도 있습니다.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는 오해와 상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풀어나가는 순간 인생도 실타래가 풀리듯 술술 풀리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개성화’가 아닐까요?


 폴의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vis ta vie> (네 인생을 살아라)의 제목처럼 살아갈 용기는 아픔을 마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비록 우리에게는 마담 프루스트도, 마법의 허브티와 마들렌도 없지만 트라우마에서 꺼내 주고 아픔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는 조력자는 있습니다. 가족, 친구, 애인, 상사, 동료, 혹은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겠네요. 부디 혼자 끙끙거리며 앓지 많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상처를 소독하고 새로 시작할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From. 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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