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Dinge> (플로리안 데이비드 핏츠, 2018)
To. 미니멀리스트를 꿈꾸는 현대인들에게
저는 보부상입니다. 가끔은 조그만 핸드백 좀 들고 다니라는 할머니의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항상 A4 사이즈 파일이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의 가방을 메고 다닙니다.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냐고 궁금해하시는데, 별 것 없습니다. 다 필요한 것들이죠. 글을 쓰기 위한 노트와 볼펜, 심심할 때 읽을 미니북이나 시집, 수정 화장에 필요한 것들과 렌즈통을 담은 파우치, 손수건, 칫솔, 상비약에 지갑, 이어폰, 보조 배터리까지. 가끔은 노트북이나 헤어롤 까지 넣고 다니면 평균 서른여섯 개의 물건을 들고 다니는 셈이 되네요. 가끔씩 어깨 빠진다며 제 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거 보면 제 가방이 무겁긴 많이 무겁나 봅니다.
며칠 전 1박 2일로 속초 여행을 함께 한 친구는 저와 정반대였습니다. 큰 가방도 모자라 캐리어까지 끌고 온 저와 달리 친구는 조그만 에코백 하나만 달랑 들고 왔습니다. 잠깐 호텔 체크 아웃을 할 때도 '지갑이랑 핸드폰만 있으면 돼!'라고 외치고 쿨하게 방을 나서던 친구. 어딜 가나 어깨와 손이 가벼운 사람들이 부러워 따라 해 보지만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맘먹고 조그만 가방을 들고 나온 날에는 항상 필요한 게 없어 불안하기만 합니다. 밥을 먹고 양치를 하고 싶은데 칫솔이 없어 찝찝하다든지, 카페에서 글을 쓰고 싶은데 노트가 없어 멍 때리게 된다든지, 렌즈를 뺏다 끼고 싶지만 파우치가 없어 참는다든지... 이런 사소한 이유 때문에 빨리 집에 돌아가길 빌 뿐입니다.
<100일 동안 100가지로 100퍼센트 행복찾기> (플로리안 데이비드 핏츠, 2018)
위 사진에 있는 물건들이 서른여섯 개이니까 입는 거, 신는 거, 착용하는 거를 모두 합치면 외출할 때 대략 오십 개의 물건을 들고 다니는 셈이 됩니다. 먹고 자는 데 필요한 물건까지 합치면 백 개는 훌쩍 넘을 것 같네요. 제가 생활하는 데 이렇게 많은 물건이 필요할 줄이야... 없어도 별 지장 없는 물건과 정말 필요한 것을 구분할 줄 하는 현명한 소유 관념이 있다면 이렇게 까지 많은 것들이 필요치 않을 텐데 말이죠.
영화 <100일 동안 100가지로 100퍼센트 행복찾기>는 과소비와 과소유의 늪에 빠져 사는 현대인들이 미니멀리스트가 되기 위해 가져야 할 태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증조모부 세대, 조모부 세대, 부모님 세대가 몇 가지 물건으로 살아왔으며 우리들은 현재 몇 가지 물건들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며 다소 진부하게 시작됩니다. <인턴십>급 두 친구의 케미스트리와 <꾸뻬씨의 행복여행>급 억지 행복 힐링 클리셰가 합쳐진 뻔한 전개이긴 하지만 모든 것이 과잉된 오늘날, 어떤 물건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지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는 한 번쯤 볼 만한 작품입니다. 수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독일 조크와 시종일관 벗고 다니는 두 친구들의 모습도 관전 포인트이고요.
스마트폰 앱 개발 회사의 공동 CEO인 폴과 토니는 거액의 거래를 따냅니다. 회사 직원들과 축하 파티를 벌이던 중 사소한 일로 말다툼이 일어나고 술김에 둘은 100일 동안 100가지 물건만으로 생활하는 말도 안 되는 내기를 하게 됩니다. 룰은 간단합니다. 입고 있는 옷과 집에 있는 모든 물건들은 보관 창고에 넣어두고 100일 동안 하루에 하나씩 물건을 돌려받는, 그런 무소비&무소유 대결입니다. 돈을 쓰거나 물건을 두 개 이상 가져오는 즉시 패배하며 근무 중 회사 비품을 이용하는 것은 허락됩니다. 참고로 폴은 스마트폰 인공지능이 추천해주는 물건은 무조건 사고 보는 과소비의 대명사이고, 토니는 자기 관리를 위해서 엄청난 물건들을 쟁여두는 과소유의 대명사인데요, 두 사람이 100가지 물건으로 살아남는 내기를 한다니 웃음밖에 나오질 않습니다.
독일 영화에 스며든 불교 정신
영화의 전개는 단순합니다. 100일 동안 폴과 토니가 창고에서 어떤 물건을 갖고 나오는지로 두 사람이 생각하는 삶의 우선순위를 보여주고 내기를 방해하는 사랑, 사업 제안 같은 요소들이 등장하며 긴장감을 더하죠. 이런 뻔한 스토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딱 한 가지입니다. 현대인의 과소비, 과소유에 경종을 울리고 현명한 미니멀리스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입니다. 폴과 토니는 반면교사가 되어 교훈을 전해주고 있네요. (물론 폴과 토니가 쓸데없는 집착을 버리고 행복을 찾는다는 행복한 결말로 끝이 나긴 합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현명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화의 도입 부분이 말해주듯이 우리 세대는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와 달리 살아가기 위해서 많은 물건을 필요로 합니다.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천 쪼가리와 배를 채울 최소한의 음식, 잠을 청할 공간만 있으면 생활이 유지되던 옛날과 달리 이제는 의식주 말고도 취미 생활이나 자기만족을 위해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에 집착하고 소유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과소비를 막기 위해서 모든 소비를 끊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공연음란죄로 잡혀가지 않기 위해서, 혹은 입에 풀칠할 정도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선 옷가지와 빵 정도가 필요합니다. 삶의 질을 높이는 약간의 사치품이 있다면 더 좋겠고요. 살아가기 위해서 이 정도 소비는 필요하죠.
하나, 무소유(無所有)-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
현명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 위한 해답은 몇 가지 물건을 갖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물건에 대한 집착을 얼마냐 버릴 수 있느냐가 열쇠이죠. 1973년에 나온 슈마허의 저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그는 부와 재산에 종속당하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한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불교 경제학을 언급합니다.
해탈을 방해하는 것은 부에 대한 집착이며, 즐거움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탐하는 마음이다. 따라서 불교 경제학의 핵심은 소박함(simplicity)과 비폭력이다. 경제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불교도의 생활방식은 경이롭다. 왜냐하면 놀랄 만큼 적은 수단으로 아주 만족할 만한 결과를 산출할 정도로 대단히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아름답다-인간 중심의 경제를 위하여』 E.F 슈마허, 문예출판사, 2002, 76pp.
놀랄 만큼 적은 수단으로 아주 만족할 만한 결과 산출하기.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 부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마음 갖기. 법정 스님은 이런 소비 생활을 무소유 정신으로 표현합니다.
내면적인 욕구가 물건과 원만한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사람들은 느긋한 기지개를 켠다. 동시에 우리들이 겪는 어떤 성질의 고통은 이 물건으로 인해서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중에서도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물건 자체에서보다도 그것에 대한 소유 관념 때문이다.
자기가 아끼던 물건을 도둑맞았거나 잃어 버렸을 때 그는 괴로워한다. 소유 관념이란 게 얼마나 지독한 집착인가를 비로소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의 사람들은 물건을 읽으면 마음까지 잃는 이중의 손해를 치르게 된다.
『무소유』 법정, 범우사, 1976, 121-122pp.
폴과 토니가 술김에 참여한 100일 동안 100가지 물건으로 살아남기 프로젝트를 힘들어했던 이유는 단순히 물건을 잃어서가 아니라 물건이 그들을 지배하는 종속 관계가 뒤바뀐 소비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죠. 폴은 스마트폰 인공지능과의 대화 없이는 외로워서 일초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토니는 탈모 방지약이나 근육 보조제, 콘택트렌즈 없는 모습에 자신감을 잃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죠. 하루가 지나면 물건을 하나씩 돌려받을 수 있지만 생활에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 없이는 24시간도 못 버티는 둘의 모습에 관객들은 박장대소합니다. 입장을 바꿔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 하루에 한 가지씩 되찾을 수 있다고 하면 똑같이 웃을 수 있을지 의문이네요. 잠깐 외출하는데도 보부상처럼 바리바리 물건을 싸들고 다니는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첫날에는 옷 조차 없어 알몸으로 물건을 보관한 창고까지 달려야 했던 폴과 토니지만 하루하루 지나가며 필요한 물건을 찾아오다 보니 어느덧 그 둘에게서 물건에 대한 집착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갖고 있는 물건을 최대한 활용해서 식사를 해결하고 빨래를 널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그렇게 하루를 느긋하게 만끽합니다. 전자 기기나 다른 사치품에 지배당하다가 여유 있게 아침 시간을 즐기는 폴의 모습은 진정으로 행복해 보입니다.
null과 과포화 상태의 중간지점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잠시 제 이야기를 하자면 5년간 일본에서 생활할 때 저의 집은 항상 과과과포화 상태였습니다. 저도 폴과 토니 못지않게 물건에 휘둘려 살았던 때가 있었죠. 부엌에 좋아하는 커피가 쌓여 있지 않으면 불안했고, 화장품도 항상 두세 개씩 쟁여 놓았습니다. 지적 허영심을 뽐내기 위해서 책이나 음반을 모아 장식해 두기도 했고요. 하지만 일본을 떠날 날이 오자 그 모든 건 짐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계절이 지난 것들은 국제 소포로 한국으로 보내고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고 나눠줘도 물건이 끝도 없이 나왔습니다. 떠날 날이 가까워지면서 가구도 하나둘씩 처리하고 텅 빈 집안에 앉아 트렁크를 식탁 삼아 식사를 하고 베개가 없어 제 손은 베고 잠을 청했습니다. 아주 만족스러운 생활은 아니었지만 물건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을 할 일이 적어지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억지로 물건을 버리고 불편한 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필수 불가결한 물건으로 행복을 느끼는 것. 이게 바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현대 사회의 미니멀리스트 정신이 아닐까요.
둘, 본래무일물(本来無一物)- 본래부터 한 물건도 없다
따지고 보면, 본질적으로 내 소유란 있을 수 없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온 물건이 아닌 바에야 내 것이란 없다. 어떤 인연으로 해서 내게 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가 버린 것이다. 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나의 실체도 없는데 그밖에 내 소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저 한동안 내가 맡아 있을 뿐이다.
『무소유』 법정, 범우사, 1976, 122pp.
폴과 토니가 IT회사를 운영하며 쌓은 부와 명예는 일시적인 것뿐입니다. 사업이 다 그렇지만 까딱 잘 못하면 모든 것을 날리게 되죠. 자발적으로 미니멀리스트 생활을 하던 두 사람은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또다시 모든 걸 빼앗기고 최소한의 물건만 가지고 훌쩍 떠나게 됩니다. 반강제로 미니멀리스트가 되었지만 폴의 표정은 오히려 후련해 보입니다. 100일 내기 덕분인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재산을 붙잡고 전전긍긍하는 것보다는 조금 부족해도 소유에서 해방되는 것이 건강한 삶이라는 걸 깨달아서 그런가 봅니다. 내기와 파산이라는 파격적인 방법을 통해 이제 두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별할 줄 아는 눈이 생겼습니다. 다시 직업을 얻고 생활을 위해 필요한 재산을 쌓아나가야 하겠지만 null과 과포화 상태, 그 어딘가 정당한 지점을 찾아내길 바랍니다.
삶의 우선순위 세워보기
연인들끼리 하는 유치한 질문 중 하나가 '무인도에 다섯 가지만 가져갈 수 있으면 뭘 가져갈 거야?' 아닐까요. 난감하긴 하지만 내 삶의 우선순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질문입니다. 생존이 될 수도 있고요, 인간다운 존엄성을 지키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 등 가치관에 따라 대답은 천차만별이겠지요.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처럼 하루 한 잔의 위스키와 한 모금의 담배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 친구만 있다면 다 필요 없다는 낭만적인 대답도 괜찮겠네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선순위를 매겨보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3개월치 생활비와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글을 쓸 수 있는 노트북으로 정했습니다. 무엇을 정하든지 자유이지만 우리 모두 우선순위와 본인의 삶이 뒤바뀌는 일이 없는 주체적인 소비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게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현명한 미니멀리스트이니까요 : )
From. 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