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니 핑크> (도리스 되리, 1994)
To. 이번 생일도 혼자인 이들을 위해
<파니 핑크> (도리스 되리, 1994)
유월 오일. 스물다섯 번째 되는 생일에 또다시 이 영화를 꺼내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 이 영화를 본 것은 일본 간사이 공항에서 근무하던 스물네 번째 생일을 앞둔 날이었습니다. 교토에서 오사카로 이사 오던 날 남자에게 차이고 4개월이 흐른 뒤였지만 연애는 무슨, 썸 조차도 없어 외로움을 달래려 같이 일하던 언니들과 술만 진탕 마시던 때였죠. 조그만 소문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회사였기 때문에 사내 연애는 하고 싶지 않고, 밖에서 남자를 찾자니 새벽 2시에 퇴근해서 양말 빨고 자기 바쁘고……. 그렇게 스물네 번째 생일에 저는 혼자였습니다.
그러다가 찾게 된 영화가 <파니 핑크>입니다. (원제는 <Nobody Loves Me>) ‘집, 직업, 친구 등 필요한 것은 다 가지고 있지만, 정작 사랑할 남자가 그녀에겐 없다.’란 영화 설명 첫 줄을 읽자마자 ‘아, 이건 내 얘기다!’라고 외치고 영화를 틀었습니다.
파니 핑크는 당시의 저와 닮은 점이 매우 많습니다. 그녀는 공항에서 소지품 검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스케줄 근무 탓에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합니다. 낡은 아파트는 집이라기 보단 눈만 붙이는 용도로 쓰이고 무엇보다, 사랑할 남자가 없습니다. 다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기댈 사람, ‘오늘 날씨가 좋네.’ ‘열쇠는 챙겼어?’ 등의 일상을 공유할 남자가 없어 그녀의 가슴엔 구멍이 뻥 뚫렸습니다. 이렇게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하며 영화를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아무리 명상을 하며 ‘난 아름답고 똑똑하고 사랑받는 존재다’라고 자기 세뇌를 해도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파니 핑크와 저를 괴롭혔습니다.
The One Where They All Turn Thirty
여기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은 사람이 또 있습니다. 대학생 시절 즐겨 보던 미드 <FRIENDS> 시즌 7 14화에는 레이첼의 서른 번째 생일 파티와 나머지 친구들이 서른 살 생일 때 벌인 흑역사가 나옵니다. 스무 살에 이 에피소드를 봤을 때는 ‘뭐 저리 유난을 떠나? 나이 먹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그리고 ‘서른 살에 스물다섯 살 애인 만날 수 있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는데, 5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니 레이첼의 심정이 매우 이해가 가더군요.
물론 제가 올해 30살이 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서른이든 스물다섯이든 분수령을 넘는다는 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서른 전에 인생의 많은 목표를 이루는 이들이 있는 반면, 부족해 보이는 자기 상황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 레이첼은 인생 계획을 세워봅니다. 서른다섯에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 둘을 낳고 살겠다는 계획을 세우지만 거꾸로 계산해서 올라가면 지금쯤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사람이 있어야 했죠. 하지만 레이첼의 애인 테드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는 스물넷 청년입니다. 더 이상 자기 자신이 말초적인 즐거움만 추구하며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자신의 서른 번째 생일날 애인과 헤어집니다.
저는 비혼주의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진지한 관계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남자를 만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20대 초반을 벗어나게 되니 일, 가족,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끊이지 않더군요. ‘과연 내가 하려는 일을 10년이 지나도 안정적으로 할 수 있을까?’ ‘내가 나 자신과 가족들을 책임질 만큼의 돈을 벌 수 있을까?’ 등등. 그리고 만나는 남자들은 비혼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이때쯤 되니 다들 결혼을 입에 담더군요. ‘연애는 하고 싶지만 언제까지 결혼의 압박 없이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드는 요즘입니다.
이런저런 고민으로 뒤숭숭한 마음, 불안정한 경제 상황, 그리고 불안함을 잊기 위해 일만 벌이고 다니느라 피곤한 요즘이라 가족들에게 이번 생일은 조용히 넘어가자고 얘기했지만, 막상 그러려니 아쉽더군요. 그래서 그냥 20대 초반을 벗어나는 기념으로 성대하게 생일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진짜 인연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다시 영화 <파니 핑크> 얘기로 돌아와 볼까요? 공항에서 근무하던 시절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 끙끙거리던 저와는 달리 파니 핑크에게는 연애 상담을 해주고 그녀의 행복을 응원해주는 남사친 ‘오르페우’가 있습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그는 밀린 집세를 내기 위해 점성술사 행세를 하며 파니 핑크의 연애 코치를 해주는 대신 돈을 받고 이런저런 상담을 해줍니다.
오르페우는 그녀에게 운명의 남자는 30대 초반, 큰 키, 긴 금발, 푸른 눈에 비싼 양복을 입은 사람이고 곧 만나게 될 거라고 얘기해줍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 파니 핑크를 이어주는 숫자는 23이고,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관계를 시작하라고 합니다. 이걸 다 만족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의심이 들지만 파니 핑크네 아파트로 새로 부임한 관리인 ‘로타 슈티커’는 외적으로 모든 조건을 만족하며 차 번호판도 2323입니다. 어떻게든 인연을 이어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파니 핑크는 자기 차로 로타 슈티커의 차를 그냥 받아 버립니다.
우연인 듯 억지 인듯한 인연으로 둘의 사이는 진전되는가 싶지만 결국엔 안 좋게 끝이 납니다. 운명의 남자를 만났다는 생각에 들떠 있던 바보 같은 자기 자신과 쓸쓸하게 생일을 맞게 될 사실이 싫어진 파니 핑크가 찾아간 것은 오르페우입니다. 운명인 줄 알았던 남자와의 짧은 만남 끝에 질질 짜고 있는 파니 핑크를 보며 오르페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르페우: “이 잔을 봐. 반이 찼어 비었어?”
-파니 핑크: “반이 비었어.”
-오르페우: “봐, 그게 문제야. 없는 것이나 불가능한 것, 잃을 것에 대한 불평. 항상 부족해하는 마음.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잖아. 일, 집, 가족, 좋은 피부색. 대체 뭘 더 바라? 난 없어. 아무것도. 병에 걸렸고 곧 죽을 거야…….”
오르페우는 아프간 출신으로 독일에는 연고가 없으며 시한부 인생을 살며 돈에 쫓기는 인생을 살지만 파니 핑크보다 긍정적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남자로 상처 받은 그녀의 마음을 치유해주고 고민을 들어주며 소울 메이트가 되어줍니다. 영화 초반 파니 핑크의 해골 모양 귀걸이가 클로즈업되는데, 오르페우는 점성술사 코스프레를 하기 위해 온 몸에 뼈 그림을 그려 해골처럼 보이려 합니다. 오르페우가 곧 죽을 운명이라는 암시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파니 핑크의 귀걸이 역시 해골 모양인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해골은 죽음을 암시하는 동시에 파니에게 진정 소중한 인연은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메타포가 아닐까요.
파니 핑크의 외로울 뻔했던 생일을 밝혀주는 것도 오르페우입니다. 해골 분장을 한 오르페우가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 ‘Non, je ne regrette rien’ (아니에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를 립싱크하며 생일 케이크를 전해줍니다. 오르페우는 결국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지만 마지막까지 생일 케이크 위의 촛불처럼 파니 핑크의 인생을 밝혀주었습니다. 바로 옆에 이런 소울 메이트가 있는데도 떠나고서야 빈자리를 느끼는 파니 핑크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사람들이 내게 줬던 행복이건 불행이건 그건 모두 나와 상관없어요
영화의 도입부와 엔딩, 그리고 오르페우가 파니 핑크에게 생일 케이크를 전달하는 장면에서 모두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대가를 치렀고, 쓸어버렸고, 잊혀진 기쁨과 슬픔들은 모두 필요하지 않다. 그 사랑의 흔적, 전율 모두 후회하지 않는다는 이 노래의 가사가 바로 영화 <파니 핑크>가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파니 핑크가 불행한 이유는 자존감 부족 때문입니다. 물 잔이 반이 찬 것이 아니라 비었다고 대답하는 시점에서 그녀는 이미 회의적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르페우의 말처럼 모든 걸 가졌지만 본인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남에게 사랑을 받는 것도, 사랑을 주는 것도 서툴러 관계 유지가 힘들어집니다. 오르페우의 조언대로 세상의 밝은 면을 보려고 마음가짐을 바꾼 파니에게 찾아온 새로운 인연은 부디 행복하게 지속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서른한 살 생일에는 파니 핑크가 서른 살의 생일 무렵 있었던 일들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지내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항상 목말라하고 마음에 안 들어하는 성격이 좋은 것인 줄만 알았지만 다시 영화를 보며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이런 성격이 형성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생일 선물로는 다 가지진 않았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생겼으면 좋겠네요.
From. 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