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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Sep 28. 2019

괜찮아, 다 그래.

<누구> (미우라 다이스케, 2016)

To. 취업 준비에 앞서서야 나를 돌아보는 이들을 위해


 첫 취업 준비의 무대는 일본 교토였습니다. 취업 준비를 하며 가장 무서웠던 것은 탈개성화였는데요, 3월이 되면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똑같은 정장, 가방, 손목시계, 구두, 필기구, 서류봉투를 들고 다니는 취준생 무리를 볼 수 있습니다. '양복의 아오야마' (洋服の青山)라는 정장 가게로 가서 점원에게 ‘저 취업…’까지만 얘기해도 점원 분은 취준용 정장 세트를 들고 나옵니다. 다른 건 미묘한 사이즈 차이 정도랄까요. 그렇게 일본 대학생들은 그  가게에서 구입한 정장 세트를 입고 다 같이 취업 전선에 뛰어듭니다.


똑같은 검은 정장 차림을 한 취준생들. 이들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튀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이하 이미지 출처 : <누구> (미우라 다이스케, 2016)


 똑같은 모습을 한 채 우르르 몰려다니는 취준생들. 마치 소설 『모모』에 나오는 회색 인간들처럼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자기 갈 길을 갑니다. 면접 장소로 향하는 열차를 기다리며 기쁜 얼굴로 메일을 확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플랫폼 기둥에 숨어 눈물을 훔치는 사람, 스트레스와 과로로 쓰러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회색 인간들 사이에 섞여 면접을 보러 가던 날이었습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플랫폼으로 내려가고 있었는데, 어떤 아저씨가 큰 소리로 모두에게 “힘 내!”라고 외쳐주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오글거리게 왜 저러시나 싶었겠지만 그 날 만큼은 그 응원에 마음이 찡해졌습니다. 하지만 면접 전에 울기 싫어 꾹 참고 열차를 탔습니다. 면접을 잘 봤는지 어땠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네요.






취업 준비를 하기 전 나에게 물어야 할 첫 번째 질문, ‘누구?’

<누구> (미우라 다이스케, 2016)


 영화 <누구>는 일본 취준생들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개봉 시기는 딱 맞춘 것처럼 대학교 3학년 2학기, 인생 첫 취업 준비에 돌입하기 직전이었습니다. 같은 세미나 친구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보러 가기 무섭다” “취준 끝나기 전까진 보고 싶지 않은 영화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면접, 시험, 설명회... 끊이질 않는 취업 준비의 파도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주인공의 내레이션 뒤로 똑같은 정장을 입고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회색 인간들 무리와 1차 면접, 기업 합동 설명회, 필기시험 등 일반적인 취업 준비의 흐름이 조각조각 이어집니다. 그 과정을 보고 있자니 어떻게 타지에서 홀로 모든 것을 이겨냈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과거의 제가 대견한 한편, 다시는 그 과정을 겪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어 영화를 보기 힘들었습니다.


취업 준비 대책 본부를 만들어 정보를 공유하는 친구들


 ‘리쿠나비’ (リクナビ)라는 취업 사이트에 가입해 홀로 자기 연구를 하고, 업계 지도를 보며 지망 업계를 좁히고 매일 밤 기업 사이트를 뒤져가며 기업 연구를 하던 저와 달리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는 취업 준비라는 큰 파도를 함께 이겨나갈 동료들이 있습니다. 전 연극부 소속으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타쿠토’, 유학을 마치고 복학한 ‘미즈키’, 밴드부 보컬이지만 왠지 출판사만 지원하는 ‘코타로’, 외국어 특기자인 ‘리카’와 그녀와 동거 중인 예술파 남자 친구 ‘타카요시’까지. 감독은 이 개성 넘치는 다섯 캐릭터의 서사로 취업 준비 중인 청춘이 겪을 수 있는 일들과 감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아가 취준생이라는 개성 없는 회색 인간을 다섯 가지 프로토 타입으로 나눠 관객들에게 자신은 누구와 닮아 있는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합니다.






두 번째 질문, '나는 왜 취준생이 되었는가?'

“생각해보니까 나,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밴드부 보컬로 활동했으니까 음악 업계, 연극부 부원이었으니까 엔터 업계….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 서서 내리는 결정 치고는 이유가 단순합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취업 전선에 뛰어든 제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요. 20대 중반 이후의 삶을 좌지우지할 결정을 아무런 고민 없이 내렸다는 게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저 유학 생활이 즐거워 허허 웃고 성적 잘 나오면 그게 최고인 줄 알고 지내다 보니 어느새 3학년 2학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영화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첫 취준 때에는 영화 업계를 지원했었습니다. 이 영화를 배급한 기업이 1 지망이었고요. 80군데가 넘는 기업에 지원하기 위해 80통의 자필 이력서를 쓰고 수많은 사전 과제를 만들어 냈지만 최종 면접까지 불러준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침대에 누워 내가 왜 떨어졌을까 고민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드는 생각이지만 면접관에게 제가 생각 없이 취업 준비 전선에 뛰어든 것을 들켜서가 가장 가까운 답인 것 같습니다. 뚜렷한 이유 없이 일본에서 밥벌이를 하기 위해 취미가 영화 감상인 외국인을 달갑게 여길 리가 없죠. 운이 좋게 서류 통과까지는 해내도 베테랑 면접관 님들의 눈썰미는 피해 갈 수 없나 봅니다.






좌표 없는 바다 위 방황하는 작은 종이배

괜찮아요 (feat. 비투비)


 영화 속 인물들은 어떤 마음으로 취업 준비에 임하고 있을까요?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지만 친구들에 비해 결과가 좋지 않아 조바심을 느낄 수도 있고,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친구가 대뜸 최종 합격 소식을 알려오면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 열심히 달려 최종 합격을 하더라도 허탈한 마음을 숨길 수 없어 하소연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결국 나는 달리기를 잘한다든지 요리를 잘하는 것처럼 취업 활동을 잘하는 것뿐이었던 걸지도 몰라. 취업 활동이 끝났는데도 뭐가 됐다는 느낌이 안 들어.”


 친구의 최종 합격 축하 파티에서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없는 마음이나 친구가 합격한 회사의 나쁜 소문을 찾아보는 비틀린 마음을 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탈락의 고배를 마시는 중 들려오는 누군가의 합격 소식에 밤새워 울기도 해봤고 취업 준비 하나 제대로 못하는 내가 싫어서 방에 며칠이고 틀어박혀 지내기도 해봤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느낄 수 있는 이런 감정은 모래사장 위에 쓴 글씨처럼 금방 지워지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취업을 대하는 본질적인 태도입니다. 절실한 이유를 가지고 목표를 향해 착실히 달려가느냐, 남을 신경 쓰다가 내 마음을 돌아볼 기회를 놓치느냐, 이 두 가지 중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집니다.


'젠니치통신 에리어직 블랙 기업'
'소분쇼인 인터넷 평가' 친구가 합격한 회사의 나쁜 소문을 검색해 자기 위로를 하는 타쿠토와 리카


 미즈키와 코타로 두 사람에게는 취업을 해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비록 그게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이유나 터무니없는 이유라도 말이죠. 하지만 두 사람에 비해 아는 것도 많고 적극적인 타쿠토와 리카가 왜 취업 준비를 하는지, 또 그들의 꿈이 무엇인지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살아가는 타쿠토와 리카를 보며 얼굴이 붉어졌던 이유는 그 둘과 제가 닮아 있기 때문인듯하네요. 내가 왜 취업을 해야 하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서 괜히 야무지게 이것저것 하는 척을 했지만 실속 있는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메일함에 탈락 메일이 쌓여 있었지만 중요한 메일이 온 척 연기한 적도 있었고, 하는 것도 없어 보이는 데 덥석 내정을 받아 온 친구를 보고 축하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때도 있었습니다.






닻을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해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타쿠토는 SNS를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봅니다. 전 연극부 동기가 극단 활동 기록을 SNS에 올리는 모습을 보고 쓰레기 같은 연극을 하며 소위 말하는 언플을 한다고 욕을 하는가 하면, 다른 친구들이 취업 활동 진행 상황을 트위터에 올리는 걸 보고 험담을 하기도 합니다. 타쿠토가 친구에게 하는 말에는 모순이 있는데요,

 

'누군가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알아채 주길 원한다면 아무것도 못 해.'
'머릿속에 있을 때는 뭐든지 걸작이지. 넌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을 거야.'


이 두 가지입니다. 전 극단 동료가 열심히 SNS로 연극 홍보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산다’라고 남에게 알리는 것보다 조용히 자기의 꿈을 그리는 게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바로 다음 메시지에서는 머릿속에서만 그리지 말고 실천에 옮기라는 뉘앙스의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타쿠토는 왜 자기모순에 빠진 걸까요? 아마도 예전 날의 저와 같이 앞으로의 인생에 관한 뿌리 깊은 가치관이 있는 것도 아니며 있더라도 강단 있게 밀고 나갈 깡도 없고 다른 취준생들처럼 뚜렷한 목표 의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취업 준비라는 노도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닻을 내려야 하지만 닻의 무게가 너무 가벼운 탓에 내가 뭘 원하는지, 내 가치관이 무엇인지 답을 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리는 신세가 되어버렸네요.






 영화가 시작되면 면접장을 배경으로 타쿠토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옵니다.


“1분 동안 말할 수 있는 건 트위터의 140글자만큼 매우 한정적이다. 짧고 간결하게 자기 자신을 얼마만큼 표현할 수 있는가, 취업 활동은 그게 전부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무렵 또다시 타쿠토가 면접을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면접관은 타쿠토에게 1분 동안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해달라고 말한 뒤 타이머를 누릅니다. 몇 초간 침묵 후 겨우 입을 뗀 타쿠토는 연극 이야기, 자기 이야기, 그리고 친구 이야기를 횡설수설 이어가지만 결국 1분 안에 이야기를 끝맺지 못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면접을 보러 갔기 때문에 제대로 대답을 못하는 게 당연한 결과죠.


"죄송합니다. 1분 안으로는 말씀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하는 취업 준비라면 과정 속에서 저나 타쿠토처럼 자기모순의 굴레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회에 내딛는 첫 발걸음이 헛발질이 되지 않도록, 당당하게 두 발로 원하는 바를 딛고 일어날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이 자가당착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빠져나오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내가 누구인지 생각해보는 겁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 양보할 수 없는 것, 행복해 지기 위한 조건, 부족한 점, 잘하는 점을 천천히 생각하는 만큼 나라는 존재는 견고해지고 어딜 가나 뿌리를 내릴 수 있을 만큼 굳건해질 겁니다. 이 과정이 없다면 취업은 물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을 손에 넣기 힘듭니다.






스물셋의 나에게 하고 싶은 말


 무궁한 앞날을 기원하는 수십 통의 메일을 받은 뒤 저는 일시 정지를 선언했습니다. 남은 학기 동안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쓰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 저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누구이며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 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혹여나 뒤처질까 신경 쓰지 않으며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 있었던 덕분에 상처를 회복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3개월 남짓한 그 시간 덕분에 저를 지킬 튼튼한 닻을 만들 수 있었고, 다시 휩쓸리고 부딪히더라도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취업 준비에 앞서 진득하게 나를 알아갈 시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후회가 남습니다. 그랬다면 취준생으로 지낸 기간을 조금 수월하게 보냈을 텐데 말이죠... 시곗바늘을 돌려 스물셋의 저를 만나러 갈 수만 있다면 이 글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제발 주위가 아닌 너의 내면의 소리를 들으라고. 그리고 네가 매일 웃을 수 있는 길을 선택하라고, 변화를 두려워하기엔 아직 젊다고요. 쓸데없이 아팠던 지난날의 저와 인생 첫 취업 준비를 앞두고 있는 모든 취준생들에게 이 편지를 바칩니다.


From. 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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