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람 Nov 25. 2019

가장 우리다운 연애

<가장 보통의 연애> (김한별, 2019)

To. 가장 보통의 연애를 꿈꾸는 이들에게     


왜 항상 슬픈 예감은 틀리질 않는가?     


 꿈을 꾸었습니다. 놀이동산에서 달콤한 시간을 보낸 뒤 꾼 꿈은 악몽이었습니다. 해고 통보를 받은 저는 먹고살 돈이 없어 막막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 집에 가니 제 짐이 모두 현관 앞에 나와 있었고 가족들은 혼자 알아서 잘 살라고 말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TV를 트니 빈부 격차 문제로 사이가 틀어진 커플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남자 친구에게 이야기하니 괜찮다고 위로해줬지만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꿈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자세히 적지 않겠지만 이제는 즐기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일을 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습니다. 무얼 해야 하나 막막한 마음과, 왜 내 행복의 유통기한은 일 년이 채 가지 않는지에 대한 원망과,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는 자책감이 저를 짓눌렀습니다.     


 집 안 상황이 이래도 데이트는 하고 싶은 나 자신도 싫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은 남자 친구는 며칠 뒤 영화 보고 맛있는 거라도 먹으면서 잠시 기분 전환을 하자며 저를 불러냈습니다. 나가려는 찰나 아빠는 오늘 밤 가족회의가 있으니 조금 일찍 들어오라고 얘기했습니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이렇게 남들처럼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아 돈을 벌고 쉬는 날이면 애인을 만나고 적당한 운동과 취미 생활을 즐기는 보통의 삶이 제 삶과 멀게 느껴지던 날 본 영화가 <가장 보통의 연애>입니다.    





                     

상처를 어루만지는 술과 밤

<가장 보통의 연애> (김한결, 2019)     


 영화관에 앉아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보통의 연애란 무엇인가, 나아가서 보통의 삶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그려질까 궁금해졌습니다. 공휴일이라 그런지 평소에는 텅텅 비어있던 영화관이 다양한 사람들로 꽉 찼습니다. ‘공휴일에 커피 한 잔 테이크 아웃해서 가족, 친구, 애인과 영화 한 편 보는 정도면 보통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던 중 영화가 시작됐습니다.      


 ‘20대 땐 사고가 나지만 30대엔 사건이 난다’라는 영화 속 명대사처럼 ‘선영’과 ‘재훈’의 사랑은 20대의 사랑보다 심하게 굴곡져 있습니다. 쓰레기 스토커 전 남친에게 인격 모독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전 회사에서 있었던 안 좋은 일로 이직을 하게 된 선영과 아내의 외도로 인한 공허함을 소주로 채우는 재훈은 직장 선후배로 만납니다. 첫인상이야 어찌 됐든, 사랑에 다친 영혼을 가진 이들끼리는 끌리는 게 있는지 술의 힘을 빌려 서로에게 다가갑니다. 술과 밤이 있는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는 공식은  둘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직장에서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척 연기를 하지만 술이 있는 밤이 찾아오면 선영과 재훈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숨기지 못합니다.      


일로 만난 사이지만 술과 밤이 쌓일수록 서로의 상처에 공감하는 선영과 재훈. 이하 이미지 출처 :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 (김한별, 2019)


 짧은 사회생활을 되짚어 보면서 어쩌면 30대의 연애, 혹은 직장인의 연애는 선영과 재훈처럼 술과 밤 그리고 상처, 이 세 가지 키워드로 압축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아직 30대의 연애를 경험한 것도 아니고 이 영화 한 편을 30대 연애의 전부로 삼을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을 봐도, 다른 미디어 매체를 봐도 술과 밤과 상처가 사랑에 불을 붙인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십 대의 끝자락에 대치동의 모 영어 학원에서 강사로 만나 퇴근 후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던 부모님. 몇 번의 연애 끝에 다친 내면을 위로하는 마음과 같은 직장에 다닌다는 전우애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싹트게 했습니다. 전 직장에서는 사내 연애로 만나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는 커플이 몇몇 있었습니다. 서비스직이 갖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할 만한 돌파구는 연애가 딱이라는 걸 그들을 보면서 느꼈습니다.           





  

보통 아닌 두 사람이 만드는 가장 보통의 연애     


 <연애의 온도> (2012, 노덕)가 사내 커플의 끝나가는 사랑을, <나의 사랑 나의 신부> (2014, 임찬상)가 신혼부부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려냈다면 <가장 보통의 연애>는 30대 직장인이 겪을 수 있는 아픔과 사랑을 거칠게 담고 있습니다. 제목은 <가장 보통의 연애>이지만 두 주인공의 상황은 보통의 범주와 사뭇 다릅니다. 물론 선영과 재훈이 서로에게 빠지는 과정에는 술, 밤, 상처라는 보편적인 공식이 적용되지만 두 캐릭터만 놓고 보면 보통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힘든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이혼을 당하고 팔이 부러질 정도로 술을 퍼마시는 게 보통의 삶일까요? 혹은 전 직장에서 직장 상사에게 꼬리 쳤다는 억울한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도 한마디도 못 하는 것, 집에 무단 침입해 난리를 쳐 놓은 전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지만 걸레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 보통일까요?      


 

 이렇듯 <가장 보통의 연애>는 보통 아닌 삶을 사는 두 남녀를 통해 30대의 연애를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은 이들이 보통의 연애를 한다니 어딘가 모순이 있는 듯하네요. 그런데 저는 이 모순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구김살 없는 남녀가 만나 아무런 장애물 없는 사랑을 이어 나가는 영화였다면 제 마음은 더 아팠을지 모릅니다. ‘아, 다들 저렇게 먹고살고 연애하는 데 굴곡이 없구나. 그런데 나는 왜 이런 상황에 있을까….’하고요. 하지만 굴곡 있는 선영과 재훈이라는 인물들이 서로를 통해 보통의 연애를 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니 희망이 생겼습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술과 밤의 힘을 빌렸을지라도 말입니다. 예쁘고 쉬운 동화 같은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 더럽고 아프고 지질하고 유치하더라도 현실적이기에 2~30대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보통의 기준은 남들과 비교하며 생기는 것     


 선영과 재훈 역시 으레 말하는 보통의 사랑을 꿈꿨을 겁니다. 연애든 결혼이든 영화 속에 묘사된 것처럼 되길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남들처럼 사랑하고 살아가길 바랄 뿐이죠. 우리가 말하는 보통의 정의엔 항상 ‘남들처럼’이라는 기준이 깔려있습니다. 남들이 누리는 행복을 나도 누리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보통의 삶이라는 것인데, 그렇게 살기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20대 중반인 저는 다양한 보통의 연애상을 봐 왔습니다. 중고등학생 때는 방과 후 집 앞까지 바래다준 남자 친구와 입맞춤을 하는 앞집 언니를 보며 저런 게 학생의 연애라는 것을 알았고, 학부생 시절에는 동아리에서 만나 술자리를 함께하고 어쩌다 보니 사귀게 되는 동기들을 보고 조금 가볍고 덜 순수해진 보통의 연애에 안타까워했습니다. 제가 나이를 먹으니 친척 언니 오빠들도 만남의 형태는 다르지만 각자 반려자를 만나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30대 초반이 되면 연애가 아니라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도 늘어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고, 결혼하지 않고 장기간 연애를 하는 이들을 보며 저런 삶도 행복하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몇십억 분의 일로 만나 서로가 가진 여러 가지 모습 중 어느 하나에 끌려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 바로 연애인만큼 연애의 형태에는 헤아릴 수 없는 경우의 수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보통’이라고 착각하는 사랑의 테크 트리는 로맨틱 러브 이데올로기 (*평생 한 명의 이성을 사랑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바람직한 사랑의 형태라는 관념)에서 기인한 시대적 고정관념이 아닐까요. ‘연애-결혼-출산’의 경로에서 이탈한 사랑은 모두 정상이 아니므로 손가락질하는 동시에 나 자신도 손가락질받지 않도록 아등바등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그게 바로 ‘보통의 연애’라고 최면에 빠져서 말이죠.     


 작중 재훈은 이렇게 말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평생 서로 바라보면서 같이 늙어가는 것. 그게 인생에서 진짜 행복한 거 아니니?”     


 결혼이란 개인의 자유이므로 잠깐 제쳐두겠습니다. 그 부분을 뺀다면 저는 이 대사가 무척 마음에 듭니다. 보통이고 남들의 시선이고 다 제쳐두고 마음 맞는 사람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게 최고라는 가치관이 저와 맞기 때문이죠. 먹고사는 데에 보통의 속도를 따라가기도 벅찬데 굳이 연애까지 아득바득 보통의 틀에 맞춰야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좋자고 하는 게 연애인데 남들 눈치를 보고, 남들보다 부족하거나 느린 점이 있으면 우리 연애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고민하게 되고... 저는 사랑에 있어서까지 이런 고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재훈의 대사처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를 바라보며 우리만의 시간을 서로의 마음에 새기는 것이 지양하는 연애관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보고 들었던 여러 연애의 모습이 보통의 연애라면 저는 보통의 연애를 거부하겠습니다. 늦든 빠르든 서로에게 맞는 속도로 하나뿐인 연애의 형태를 만들어 가고 싶네요.              





           

다시 현실로     


 영화가 끝난 후 어땠냐고 묻는 듯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보통의 연애 따위 필요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런던 시계탑 밑에서 사랑을 찾을 확률로 만나 이어지기가 쉽지 않은데, 그런 소중한 인연에게 보통의 잣대를 들이밀며 관계를 위태롭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비록 집 안 사정은 좋지 않고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모르지만 서로를 보면 힘이 되고 나아갈 용기가 생긴다면 그걸로 좋습니다. 갑자기 차가워진 바람에 몸을 녹이기 위해 식당을 찾았습니다. 저녁 시간이지만 바로 좋은 자리에 앉아 덮밥 두 개와 국물 요리 하나를 시켜 나눠 먹었습니다. 우울했던 기분은 다 날아가고 너무 맛있어서 웃음이 났습니다.      


 같이 있으면 빠르게 흐르는 시간에 아쉬워하고, 만나지 않는 날에는 열심히 일하고, 목소리가 듣고 싶으면 통화를 하며 각자의 꿈을 이야기하고... 보통의 연애 대신 이렇게 가장 우리다운 연애를 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밤입니다.  

    

From. 가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