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세상의 끝> (자비에 돌란, 2016)
To. 다가오는 명절, 가족이 싫어진 이들에게
인생이란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수많은 선택(Choice)이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가족. 집은 태어나서 가장 먼저 속하는 집단이자 작은 사회, 인간이 사회성을 기르는 최초의 장입니다. 이소라 님의 노래 <Track 9>의 가사처럼 우린 알지도 못하는 세상에 태어나 우리가 짓지도 않은 이름으로 불리며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태어나 처음 만난 사람들과 처음 속한 가정이라는 장소에서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는데, 이렇게 중요한 처음을 우리 손으로 결정할 수 없다니, 억울하네요.
집이란 선택할 수도 없는 존재인 동시에 연을 끊을 수도 없는 불가항력의 존재입니다. 살면서 가끔은 손과 실을 따져 과연 이 관계가 나에게 득이 되는가 계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마이너스를 안겨주는 사람에겐 안녕을 고하기도 하죠. 하지만 가족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준다고, 혹은 귀찮게 군다는 이유로 연을 끊지 못합니다. (물론 DV 같은 용서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나오는 것이 맞습니다. ) 우리가 바보짓을 해도, 답답하게 굴어도, 짜증을 내도, 서로의 마음속에서 우린 영원한 호적 메이트 일 겁니다.
<단지 세상의 끝> (자비에 돌란, 2016)
그렇다면 가족은 항상 우리를 보듬어주는 사람이고 집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는 공간일까요? 잔인하지만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저는 기분이 안 좋은 상태로 집에 돌아와야 할 때,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실컷 울고 울다가 지치면 잠을 자고 싶지만 표정이 구겨진 상태로 귀가하는 순간 식구들의 질문 공세가 끊이질 않기 때문입니다. 걱정도 1절만 하면 좋을 텐데 계속해서 나의 상황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가족들 때문에 집은 쉴 수 없는 공간, 아늑해야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는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마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기분 좋게 퇴근하고 한바탕 싸운 듯한 집안 분위기에 눈치를 보게 되고, 휴일에는 쉬고 싶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 때문에 신경이 피곤해집니다.
매일 같이 보는 식구들과의 갈등 이외에도, 명절 때나 가끔 보는 먼 가족들과의 갈등도 우리의 마음을 다치게 합니다. 촌수로 따지면 가족이지만 어쩌면 친구나 이웃보다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죠. 오래간만에 본 가족들이 묻는 거라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요즘엔 어떤 행복한 일들이 있었는지가 아니라 돈을 얼마나 버는지, 다니는 학교, 직장은 얼마나 좋은 곳인지, 혹은 사귀는 사람은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등 수치로 따질 수 있는 것들을 물어봅니다.
내가 선택하기도 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 가족이자 나의 뿌리이기 때문에, 가족이 우리를 완벽하게 이해할 거라는 착각을 합니다. 결국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남이고 배려와 존중이 필요한데 말이죠. 가장 가깝고 당연한 존재이기 때문에 말을 안 해도 이해해 주리라 기대하고, 그 기대가 깨지면 더 상처를 받는 게 가족인 것 같습니다. 가족이 나에게 당연하지 않은 것을 바라고, 내가 지쳐 내 밥그릇만 챙기며 살면 화를 내고 피곤하게 하는 일에 지쳐 가족과 잠시 떨어져 지내고 싶은 이들이 있을 겁니다.
‘12년의 부재, 3시간 동안의 만남’
자비에 돌란 감독의 여섯 번째 영화 <단지 세상의 끝>은 가족과 집을 시니컬한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입니다. 감독은 초반부터 집이란 항상 따뜻한 공간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노래 가사를 통해 각인시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세상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구나, 우리 가족만 만나서 싸우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위안이 됐습니다. 그렇다면 자비에 돌란 감독이 건드린 보편적이면서 불편한 가족의 면모는 어떤 것일까요?
12년간 가족과 떨어져 살던 ‘루이’. 자신이 시한부 인생임을 고백하기 위해 가족을 찾아가는 모습 뒤로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는 루이의 귀향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암시해줍니다. 루이의 표정도 들떠있기보다는 근심과 걱정에 젖어 있습니다. 마치 명절 때 가볍지만은 않은 마음을 안고 각자 고향으로 향하는 우리네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12년 만에 발을 들인 집에서 그를 반기는 것은 엄마와 여동생, 형과 처음 보는 형수님입니다. 가장 편한 관계여야 할 사람들끼리 한껏 꾸미고 격식을 차려 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보면 조금 이질적으로 느껴집니다. 애써 대화를 하려고 해도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색한 웃음과 침묵. 애틋할 줄 알았던 재회는 시답잖은 이야기와 어색한 포옹으로 끝이 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머나먼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영화 속 가족의 모습이 언어만 빼면 우리네와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오랜만에 보는 아들이 반가워 웃음이 끊이질 않는 엄마와, 그런 엄마가 부끄러워 화를 내는 아들. 괜히 들떠 틱틱거리는 딸. 그리고 제삼자의 눈으로 상황을 중재하고 눈치를 보는 며느리까지. 여느 가정이 이런 모습이라곤 장담 못 하겠지만 제가 가족 모임에서 느꼈던 티키타카가 여기 다 모여있습니다.
철이 든 자식들이 옛날 추억을 꺼내는 부모님 모습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비슷합니다. 오글거려도 받아주고 같이 웃어주는 착한 자식들이 있는 반면, 저처럼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올해 초 큰 아버지 생신 잔치가 끝나고 사촌 언니네 집에서 뒤풀이를 할 때였습니다. 조카 손주가 너무 귀여운 나머지 엄마와 고모들은 조카들 어릴 때 기억이 난다며 우리를 향해
-‘가람아 너도 어릴 때 오지게 울어댔다.’
-‘XX야 넌 어릴 때 장난감 뺏으면 집이 떠나가도록 소리 질렀다.’
-‘XX야 너는 아기 때 아빠 껌딱지였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머리에 피가 마른 조카들은 못 들은 척하며 핸드폰이나 쳐다봤습니다.
이 영화 속 자식들도 비슷해 보입니다.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던 중 일요일 전통이라는 추억을 소환하는 엄마를 향해 그만하라고 소리 지르는 아들과 들떠 있는 시어머니 맞춰드리는 며느리, 그래도 엄마 편 들어주며 촌스러운 노래에 맞춰 같이 춤춰주는 딸.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입니다. 영화 <고령화 가족>에서 서로 욕하고 때리고 소리 질러도 가족이 당하고 있으면 물불 안 가리고 도와주는 웃기면서도 따뜻한 모습을 이 영화 속 가족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폭격기처럼 일방적으로 감정을 쏟아내는 모습 또한 익숙한 모습입니다.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 해온 가족이기에 서로를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어찌 됐든 식구들도 내가 아닌 남입니다. 대화를 해도 서로의 마음을 다 안다는 것이 불가능한데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해 줘야 하고 이해받아야 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가족 간 불화의 씨앗이 되죠.
루이네 가족은 어색한 재회와 낯부끄러운 추억 팔이를 끝내고 서로에게 겨우 익숙해졌습니다. 루이도 손님이 아니라 가족의 일부로 녹아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익숙함이 불러온 것은 안락함이 아닌 서로를 향한 배려 없는 대화입니다. 반갑게 맞아주긴 했지만 식구들은 루이가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집을 떠난 것에 불만을 품고 있고 루이가 그들의 삶에 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엄마는 서운하지만 넌 내 아들이니 사랑한다고 말하고, 여동생은 오빠와의 추억이 없어 같이 있는 순간이 어색하기만 합니다. 형은 루이에게 말도 걸지 않아 형수가 대신 루이에게 서운한 점을 이야기하죠.
루이는 자신이 병에 걸렸음을 가족에게 고백하기 위해 집을 찾았지만 아무도 루이가 왜 집을 찾아왔는지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말도 없이 십 여 년간 집을 떠났던 사람이기 때문에 돌아올 때도 별 이유가 없으리라는 추측, 혹은 얼굴을 안 본 지 너무 오래돼 물어보기 어려운 마음에 그저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 얼굴로 루이를 반갑게 맞이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짧은 재회를 웃으며 끝내기엔 서운한 감정이 너무 컸나 봅니다. 루이의 감정 따위는 모르겠고 얼굴 보고 그동안 쌓였던 감정을 표출하고 싶어 하는 식구들 때문에 12년 만의 가족 모임은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인간은 모두 한 마리의 연어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는 일이 기쁘지만은 않은 이유는 내가 외면하고 살았던 것들을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나간 시간과 변해버린 서로의 모습에 마음이 불편해서 두서없이 아무런 말이나 하게 되거나 퉁명스럽게 받아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영화의 시작 지점,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흘러나오는 루이의 독백. 그는 가족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가족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이유도 수없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가족을 떠나는 데에는 가지각색의 이유가 존재하지만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별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감독은 루이가 왜 집을 떠났는지 정확한 이유를 대지 않습니다. 관객은 무슨 이유에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12년 동안 얼굴을 보지 않을 정도의 대단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짐작할 뿐입니다. 그런 루이도 죽음이 가까워지자 나고 자란 집을 찾아갑니다. 루이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루이가 집을 찾아간 것은 동물의 회귀 본능 때문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죠.
루이가 12년 만에 다시 찾은 가족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겁니다. 그동안 외면하고 살았던 시간 동안 가족 간의 관계에 기름때가 끼어 부드럽게 돌아가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과거의 루이는 어떤 이유에서 가족을 외면하고 살아도 될 정도의 존재로 여기고 집을 떠났습니다. 루이에게 식구들이란 그 정도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가족들과 재회했을 때 루이는 그들의 변한 모습과 차가운 모습에 절망보다 더한 고독을 느낍니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루이에게 감독은 '단지 세상의 끝'이라고 말합니다.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가족이 주는 소외감은 별 거 아니고 단지 세상 하나가 무너지는 느낌이라고요.
연어는 바다에서 서식하지만 태어나는 곳은 민물입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산란기가 되면 바다를 거슬러 민물로 돌아오죠. 우리 인간에게도 이런 회귀 본능이 있기 때문에 외면하고 도망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성인이 된 이후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고 혼자 해쳐나갈 수 있다는 착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묵묵히 뒤에서 저를 지탱해주던 집이라는 존재를 잊은 채 말이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저를 응원해주는 건 가족이었고, 저런 생각을 했던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도 가족이었습니다.
가족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나와 함께해온 당연한 존재이고 모든 걸 이해해주리라 믿기 때문에 서로의 배려 없는 말과 행동에 더 예민해집니다. 그래서 집을 마음을 다치는 곳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집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하더라도 그건 가족이 서로를 많이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나아질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다가오는 추석, 좋은 일만 있진 않겠지만 가족과 함께 잘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From. 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