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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May 03. 2019

사랑에 빠진 나는 강하다

<펀치 드렁크 러브> (폴 토마스 앤더슨, 2002)

To. 사랑에 미친 자기 모습이 어색한 이들에게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사랑은 원래 미친 짓이죠. 그걸 인정하고 제 모든 걸 바쳐 사랑할 용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연애를 시작하면 상대에게 제 마음을 어디까지 표현해야 하나 고민됩니다. 상대방의 애정 표현에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좋은 내색도 못 하고요. 그렇게 연애의 제일 달달한 찰나를 만끽하지 못한 채 떠나보내버립니다.


 반면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속 주인공 주준영은 직진파입니다. 초등학생 때 <그사세>를 처음 본 뒤 제 롤모델은 일 욕심 많고 사랑 앞에서는 솔직한 주준영으로 정했습니다. 자기 마음을 숨김없이 내보이고 싸우고 나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이 애인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이 얼마나 멋지던지. 대학생 때 엄마와 함께 재방송으로 <그사세>를 보고 있는데 엄마가 물었습니다.


 “너는 저렇게 싸우고 나서도 남친한테 전화해서 멸치 어떻게 보관해야 되는지 물어볼 수 있어?”


 왜 싸우고 내가 먼저 전화해서 시시콜콜한 얘기를 해야 되는지 모르겠지만 얼떨결에 그렇다고 대답했죠. 연애에 있어 주준영이 되긴 아직 멀었습니다.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지음, 북로그컴퍼니, 2015, 15pp.


 노희경 작가님의 에세이 첫 장에 나오는 저 글귀를 마음에 새기고 사랑에 임하려고 하지만 매번 실패합니다. 아무래도 쓸데없이 높은 콧대와 낮은 자존감이 섞여 사랑에 빠진 제 모습을 부정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나 봅니다.






자존감이 낮아 연애가 두려운 이들을 위한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 (폴 토마스 앤더슨, 2002)


 사랑에 빠진 이의 정신없는 마음을 대변하는 영화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펀치 드렁크 러브>입니다. 직역하자면 두들겨 맞고 술에 취한 사랑. 너무 원색적이지 않나 싶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아’하고 제목의 의미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여자 형제만 7명인 ‘배리’는 아무래도 여자와 진지한 만남을 가져본 적이 없는 듯하네요. 뚫어뻥 공장의 책임자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왜 연애를 못하는지 잘 알 것 같습니다. 도날드 덕이 입을 법한 진파랑 색 양복을 빼입고 항공사가 주최하는 마일리지 쿠폰 이벤트에 목을 매고요, 분노 조절 장애도 있어 보입니다. 얼마나 연애를 안 했으면 누나들이 게이 아니냐고 오해까지 합니다. 사실 여자를 좋아하지만 만날 기회가 없어 폰섹스 회사에 전화를 거는 불쌍한 남자인데 말이죠.


갑자기 찾아올 정신없는 사랑을 예고하듯, 영화는 풍금을 줍는 배리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이하 이미지 출처 : <펀치 드렁크 러브> (폴 토마스 앤더슨, 2002)


 하지만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배리네 공장 앞에 버려진 풍금처럼 찾아옵니다. 동생 친구 ‘레나’가 배리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모태 솔로인 (듯한) 배리는 아무것도 재고 따지지도 않고 레나의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폰섹스 업체 사람들에게 금품 갈취를 당하고, 첫 데이트에서는 화장실을 부숴 먹고, 레나를 쫓아 하와이로 가기 위해 미친 듯이 비행기 마일리지 쿠폰을 모으는 등 배리의 사랑은 아주 다이내믹합니다. 그리고 텔레포트라도 하는 듯한 화면 전환, 뮤직뱅크 감독님 뺨치는 카메라 워킹, ‘퉁타타탇 띵팅또롱’거리는 사운드까지 합세해 사랑에 빠진 배리의 정신없는 마음이 아주 원색적으로 표현됩니다.






“내가 지금 얼마나 센지 넌 모를 거다. 난 사랑에 빠졌거든.”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넌다고 해야 하나, 사귀기 전에 엄청 재고 따진다고 해야 하나, 저는 연애를 시작하기까지 에너지 소모가 많습니다. ‘내가 지금 연애를 해도 되는 상황인가.’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상대방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줘도 되나.’ 등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집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의 연애의 표본이 바로 접니다.


 배리 역시 자존감이 낮아 사랑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펀치 드렁크 러브>의 명대사 "내가 지금 얼마나 센지 넌 모를 거다. 난 사랑에 빠졌거든."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랑의 힘은 찌질한 배리를 바꿔놓을 정도로 대단합니다. 여자 형제들 사이에서 자라 음기에 눌린 배리는 찌질하고, 정당하게 컴플레인을 걸 줄도 모르고,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물건을 부수는 ‘어른이’입니다. 그러나 레나를 만난 후 강력한 사랑의 힘이 배리의 내면을 다듬어 준 덕분에 그는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나죠.


"당신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몰라. 이게 마지막이야 매트리스 맨."


 자신의 약점을 숨기기 급급했던 배리지만 레나에게만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다가갑니다. 금이 간 내면을 사랑하는 여자와의 대화로 풀칠하고 성숙해진 배리는 이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악덕 폰섹스 업체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무거운 풍금을 들고 사랑하는 여자네 집까지 뛰어가는 모습이 바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의 힘’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아닐까요. 비 온 뒤 땅이 굳는다고, 어지러운 전개 끝에 아름다운 풍금 선율로 마무리되는 둘의 사랑 이야기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사랑의 시작을 예고한 풍금을 연주하며 영화는 끝난다.






뱃속에 나비가 들어앉은 기분이에요


 사랑을 한다는 것 자체가 배속에 나비가 들어앉은 것처럼 오뇽오뇽한 일입니다. 뱃속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치는 것처럼 몸이 베베 꼬이고 가슴이 울렁거리는 기분에 사랑에 빠진 자들은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괜한 자존심을 부리며 그런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랑에 빠진 모습도 또 다른 나이니 너무 어색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인생의 흐름에 따라 사랑의 형태도 바뀌는 법. 각 단계마다 겪어야 할 사랑이 있고, 그래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을 시작할 때마다 모든 조건을 재고 따지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눈 앞에 할 일이 있는데도 그 사람만 생각나고 웃음이 새어 나오는 자기 모습에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요. 다 스쳐 지나가는 한 단계일 뿐입니다.


From. 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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