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람 Apr 29. 2019

모든 시작은 불시착

<마카담 스토리> (사무엘 벤쉬트리, 2015)  

To. 차가운 아스팔트 같은 인간관계에 지친 이들에게


당신의 이웃은 안녕하십니까?


이웃에 관한 나의 첫 기억.


 이십오 년 동안 이웃 없이 살았던 적은 없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입성한 곳은 대치동 청송 빌라. 다섯 살 때까지 살았던 나의 첫 집이자 할아버지가 사주신 세발자전거를 타고 옆집 오빠와 썸을 탔던 분홍빛 추억이 서린 곳입니다. 잠시 2층짜리 단독주택에서 살다가 강동구로 이사를 가 유치원부터 대학 3학년까지 나의 집은 서울 암사동의 한 아파트였습니다. 앞 집에 살던 언니 오빠와 햄스터를 같이 키우고 등교할 때 외고 교복을 입은 언니의 모습에 반했던 기억이 나네요.


 일본어에는 ‘向こう三軒両隣’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길 건너편 세 집과 양 옆의 두 집이란 뜻으로, 친한 이웃을 가리키는 표현이지만 경험해본 바 옛날에나 통하던 말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 저는 교토의 한 맨션에서 4년을 꽉 채워 보냈으나 한 번도 옆 집에 누가 사는지 본 적이 없습니다. 총 28가구가 사는 4층짜리 방음이 안 되는 건물 3층 맨 끝 방 한가운데 누워 소리로만 이웃들이 무엇을 하나 유추할 뿐이었죠.


 현재 경기도의 모 아파트에서 거주 중인 우리 가족의 이웃은 낮이나 밤이나 쿵쿵거리는 토끼 같은 아이들이 사는 윗집과, 할머니 말에 따르면 ‘택배를 무지하게 시키는’ 앞집 정도입니다. 저번 설날 윗집 어머니께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며 기름 세트를 들고 찾아오셨습니다. 새벽에도 콩콩거리는 아이들 소리가 선물 세트 정도로 해결될 소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프라이팬에 기름 한 번 휙 두르며 웃어넘기고 있습니다.






정을 베풀어도 오지라퍼 소리 듣는 세상


 요즘 우리는 남을 도와줬다가 오지랖 넓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혹은 다가가고 싶지만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관계를 시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도 아니지만 친한 척 하기도 그런 이웃들과도 마찬가지고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을 때의 숨 막히는 정적이 싫어 웬만하면 인사를 하지만 받아주시는 분도 계시고 아닌 분도 계신다는 사실이 슬프네요.


 경기도에 살다 보니 전보다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대중교통에서도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게 되는 상황이 많은데요,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했더니 양보받을 만큼 늙지 않았다고 하시는 분이 계신가 하면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줘도 낚아채가는 사람이 있어서 인가 봅니다. 그래서 도와주는데도 한 번 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얼마 전 광역버스를 타고 가다가 앞에 앉은 여자분 주머니에서 카드가 떨어졌는데 주워드렸다가 제가 오해받는 거 아닌가 싶어서 도와드릴까 말까 잠시 고민했었습니다. 밑에 카드 떨어진 거 아니냐고 말을 걸었더니 다행히 그 여자분은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시작은 불시착

마카담 스토리 (사무엘 벤쉬트리, 2015)


영화의 배경이 되는 아파트 단지. 이하 이미지 출처 : <마카담 스토리> (사무엘 벤쉬트리, 2015)


 영화의 원제는 <ASPHALTE>. 사무엘 벤쉬트리 감독이 어린 시절 변두리 공공주택에 살았던 경험을 토대로 쓴 ‘아스팔트 연대기’를 각색한 작품이라고 하네요. 마카담은 아스팔트를 발명한 사람의 이름이자 건축 공법을 일컫는 용어이자 프랑스 피카소 단지에 있는 한 낡은 아파트의 애칭입니다.


 영화 <마카담 스토리>의 주인공들 역시 관계의 부재에 쓸쓸해합니다. 원래 군중 속의 고독이 더 쓸쓸한 법. 아파트라는 공동 집단에 소속해있지만 이웃 간의 정다운 모습은 볼 수 없습니다. 대신 차가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방 안에서 각자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할 뿐이죠. 어딘가에 불시착한 우주선처럼 어이없고 황당한 만남은 외로운 입주민들의 마음을 달래 주는 한 줄기 빛입니다.


 프랑스의 한 아파트 단지 마카담. 우연히 만난 아무런 접점이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노력하고 한 걸음씩 다가갑니다. 같은 단지에 살아도 남남인 요즘 세상이라 그런지 마카담 단지 내에서 이뤄지는 만남들은 따뜻한 치유로 가슴을 어루만집니다.




 


 운동 과다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2층에 사는 남자는 새벽 몰래 엘리베이터를 타고 근처 병원으로 가 자판기에서 과자를 빼먹는다. 삼 교대에 지쳐 담배 휴식을 가지러 나온 간호사와 눈이 맞은 그는 자신을 인터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작가라고 소개한다.




 

 하는 것 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소년은 새로 이사 온 여자를 만난다. 여자는 고장 난 현관문 때문에 소년의 도움을 받고 둘은 영화를 보며 가까워진다.





 

 마카담 단지 옥상에 NASA 우주비행사가 불시착한다. 전화기를 빌리러 들어간 집은 감옥에 간 아들 때문에 혼자 사는 아랍계 할머니네. 영어를 못 하는 할머니지만 쿠스쿠스 만드는 솜씨 하나는 끝내준다.

 


 

 영화는 위 세 가지 이야기가 옴니버스 식으로 진행되며 서로 만날 일 없는 사람들이 한 발자국 다가가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감독은 답답해 보이는 화면 비율을 고집하며 주인공들을 좁은 화면 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덕분에 두 인물이 작은 공간 내에 같이 있는 것 같은 효과가 발생해 둘 사이는 더욱 가깝게 연출됩니다.






우주 비행선이 옥상에서 쉬고 있는 프랑스 청년들 앞에 떨어질 확률을 구하시오.


 여섯 명의 주인공이 서로를 만나게 된 건 우연의 장난이 아닐까요. 남자가 다리를 다치지 않았더라면, 우주선이 무사히 NASA 본부에 도착했더라면, 새로 이사 온 집의 문이 멀쩡했더라면…… 회색 빛 아파트 단지 내 몇 평짜리 방에서 혼자 지냈다면 관계의 발전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끔은 미국 우주 비행선이 프랑스 아파트 옥상에 불시착할 우연의 확률로 만나는 인연이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밝혀주기도 하죠.






 “저기요, 당신을 찍어도 될까요?”

중요한 것은 관계를 이어가겠다는 의지


 인연은 우연히 찾아옵니다. 그러나 우연을 기적으로 치부하고 그 힘을 맹신한다면 관계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연애든 우정이든 어떤 관계라도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유대를 더욱 끈끈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세 에피소드에서 관계의 진전은 사진-영화-요리로 표현되죠. 사진 기사라고 거짓말했지만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급조한 포트폴리오를 보며 나누는 이야기, 영화를 보며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맛있는 음식으로 정을 베푸는 마음 덕분에 삐걱거리며 시작했던 관계가 기름칠됩니다.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용기를 내는 남자. "저기요, 당신을 찍어도 될까요?"


 주인공들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장치는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그런 사소한 것들로 접점을 찾으려고 합니다. ‘혹시 뭐 드셔 보셨어요?’ ‘아, 그 영화 저도 좋아해요.’ 등등. 기막힌 우연을 유지하는 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것들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접점을 찾으면 됩니다. 그리고 받은 만큼 돌려주기. 서툴지만 한 발짝 다가가려는 용기가 삭막한 우리네 마음을 치유해 옅은 회색 빛 화면도 따스하게 느껴지네요.






WELL-COME STRANGER!


 모든 관계의 시작은 용기입니다. 영화의 캐치 카피 WELL-COME STRANGER처럼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마음을 열 용기. 요즘처럼 흉흉한 세상에 아무한테나 다가가서 친한 척하면 큰일 나겠지만 그래도, 적어도, 우주 비행사가 우리 집 옥상에 착륙할 우연의 일치로 만난 인연에게는 용기를 내어보는 게 어떨까요? 새로운 도전의 문이 열릴 수도, 맛있는 음식을 알게 될 수도,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게 기적의 힘이니까요.


From. 가람


이전 01화 영화로 쓰는 편지 intro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