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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May 10. 2019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비기너스> (마이크 밀스, 2010)

To. 처음 시작하는 이들을 위해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질병, 죽음, 이별, 만남, 사랑. 그 어떤 것도 우리네 인생으로 침투하기 전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예고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뒤바꾸는 사건은 갑자기 찾아와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난 여행이라도 예상외의 일이 생기면 당황하기 마련인데, 아무런 준비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들은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녹색지대의 노래 <준비 없는 이별>에서  ‘하루만 오늘 더 하루만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게 줘. 안돼 지금은 이대로 떠나는 널 그냥 볼 수는 없어’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정말로 하루만 더 주어진다면 마음 편하게 사랑하는 사람의 끝을 지켜볼 수 있을까요. 하루 더 같이 지낸다고 이별의 순간 눈물을 참을 수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혼자 남겨진 이의 공허함이 메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하루의 유예는 불필요한 것 일지도 모릅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듯 찾아오는 이별보다는 낫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충분한 마음의 준비란 없는 것 같네요.


 ‘준비 없는 무언가’에 크게 데고 나면 그다음 시작을 더 망설이게 됩니다. 연인과 헤어지고 나서 겪은 후유증이 자신을 얼마나 괴롭힐지 알기 때문에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이 무섭고, 반려견이 무지개다리를 건넌 뒤 찾아올 슬픔을 알기 때문에 다시 새 가족을 들이는 것에 망설입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이유들로 새로운 시작에 앞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영화 <비기너스>는 그런 이들을 위해 다시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서툴고 풋내 나고 웃긴 일인지 보여주며 우리 모두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그러니 두려워 말라는 메시지를 안겨줍니다.






시작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비기너스> (마이크 밀러, 2010)


새로운 만남과 관계의 시작이 두려운 올리버는 고슴도치 마냥 가시를 세우고 있다. 이하 이미지 출처 : <비기너스> (마이크 밀러, 2010)


 주인공 ‘올리버’의 아버지 ‘할’은 75세의 나이에 암 진단을 받은 뒤 아들에게 자신이 게이임을 고백하고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유쾌하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아버지를 여의고 몇 개월이 지나도 올리버 (38세, 일러스트레이터)는 마음 한복판에 구멍이 뚫린 듯한 얼굴로 시간을 보냅니다. 뜬금없는 아버지의 커밍아웃과 죽음으로 변한 익숙한 나날들이 준 여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올리버. 사랑하는 존재의 낯선 모습과 쇠퇴해가는 모습을 동시에 목격한 충격에 다시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두려워 보입니다.


 영화는 이별과 죽음으로 마음을 다친 올리버가 ‘안나’라는 여자를 만나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고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올리버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의 이야기, 올리버의 유년 시절 이야기가 플래시백으로 삽입되며 세 가지 이야기는 교차 진행됩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올리버의 우울한 내면이 형성된 유년 시절을 설명해주고, 아버지의 이야기는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할 올리버의 나날들에 아직 끝이 아니라고, 즐겨야 할 새로운 것들이 많이 있다고 응원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 그냥 자기만 할래요?  


 관계의 시작에 눈에 보이는 임계치가 있다면 올리버가 넘어가야 할 문턱은 저 하늘 높이 있지 않을까요? 사람은 자신이 모르는 이면을 갖고 있으며 언제 자신을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올리버는 새로운 만남에 몸을 사립니다.


 그런 올리버도 가장무도회처럼 본모습을 숨기고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할로윈 파티에서는 한결 편안해 보입니다. 프로이트 박사로 분장한 그는 파티에서 ‘안나’라는 여자를 만나고 인후통으로 말을 못 하는 안나를 위해 필담으로 대화를 이어나가죠. 가발과 수염, 수첩과 펜이라는 방어막 덕분에 두 사람은 대담하게 놀이를 하듯이 서로를 알아갑니다. 할로윈 파티에서만큼은 올리버의 시작의 문턱도 사라진 듯하네요.


두려움을 잊고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즐기는 올리버


 파티가 끝난 뒤, 가발을 벗고 거울 앞에서 서로의 진짜 얼굴을 확인하지만 아직까지 두 사람은 진지한 관계를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서로에 관해 자세한 일들은 모른 채 안나가 묶고 있는 호텔방에서 하룻밤을 보내죠. 그리고 대화를 통해 그녀가 호텔 떠돌이 생활을 하는 프랑스 배우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앞으로도 계속 호텔에서 지낼 것인지, 둘 사이의 관계가 원나잇 상대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연인으로 발전할 것인지 명확한 정의 없이 지나갑니다.


프로이트 박사와 정체모를 누군가가 아닌 진짜 올리버와 진짜 안나가 만나는 순간






네가 가진 어둠에 대해 그녀에게 얘기해야 해


 올리버와 안나의 관계는 진전되어 서로의 어두운 면과 속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까지 털어 넣어 놓는 사이가 됩니다. 이때가 관계가 나아감에 있어 가장 조심스럽고 위태로운 단계가 아닐까 싶네요. 둘의 사이가 깊어졌다는 증표로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지지만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괜히 이야기했다 상대방이 부담을 느끼면 어쩌나.’란 걱정도 들기 때문이죠.


 안나의 호텔방에서 안나의 아버지에 관한 얘기, 할의 투병 생활 등 서로의 어두운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둘은 더 가까워집니다. 이대로만 가면 아슬아슬하게 시작한 관계도 순항 고도에 진입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호텔 복도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난 뒤 미묘하게 달라진 올리버의 분위기를 파악한 안나는 그 이유가 할아버지와 돌아가신 올리버의 아버지와 닮았기 때문임을 알아차립니다. 상대방에 관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상대가 슬픔에 빠진 모습을 보니 안나는 어떻게 그 빈자리를 위로해야 할지, 과연 자신이 상처를 보듬어줄 정도로 괜찮은 사람인지 의문에 빠집니다.



 -안나: 넌 너무 많은 걸 잃었어. 내가 그걸 채워주지 못하면 어떡하지?

 -올리버: 만약 그게 널 힘들게 한다면 우린 여기서 그만둬야 해.

 -안나: 기다려. 그만 두기 싫어.


 이 일을 계기로 안나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올리버의 집에서 함께 살기로 합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집 소개를 하는 올리버와는 반대로 과연 올리버의 슬픔을 자신이 헤아릴 수 있을지 다시 의문이 든 안나는 복잡한 심정에 울음을 터뜨리고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안나에게 왜 울었냐고 묻는 올리버의 말에 안나는 대답하지 못합니다. 호텔에서 첫날밤을 보낸 뒤 입고 있던 하늘색 가운을 입고 있지만 표정은 죽어있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안나는 결국 올리버의 집을 나오게 됩니다. 둘의 관계가 진전되나 싶더니 흔들리고 있네요. 시작이 두려운 이유도 이 단계에 돌입하는 것이 무서워서가 아닐까요. 처음은 달콤하더라도 콩깍지가 벗겨지면 감성보단 이성이 뇌를 지배하고 계산적으로 변하기 마련이죠. 그리고 변한 모습은 상대에게 쉽게 상처를 줍니다.


 안나를 만나기 위해 올리버는 그녀의 집으로 가 전화를 하지만 안나는 애초에 떠나지 않았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안나는 슬픈 목소리로 묻습니다.



 -안나: 넌 왜 사람들을 떠난 거야? 왜 내가 떠나게 내버려 둔 거야?

 -올리버: 그건 아마 내가 지속될 거라 믿지 않기 때문일 거야. 그리고 그러지 않을 거라 확신하지.



 올리버가 다시 시작하기를 두려워한 진짜 이유를 고백하는 담담한 목소리 뒤로 외로운 결혼 생활을 보낸 어머니의 뒷모습과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의 마지막 기억이 삽입됩니다. 어머니는 쓸쓸하게 껍데기뿐인 결혼 생활을 보냈으며 아버지의 죽음을 처리하는 과정은 너무나도 사무적이고 기계적이었습니다. 관계의 영원함을 믿지 않는 회의적인 올리버의 모습이 납득이 가네요. 과연 올리버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이제 어떡하지


 결론부터 말하면 안나는 올리버의 집을 다시 찾았고 두 사람의 관계는 다시 시작됩니다.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집 소개를 해주던 도중 두 사람은 올리버의 아버지가 애인을 구하려고 쓴 프로필을 발견합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전 잠자리 상대를 구하기도 하지만 만남이 지속되기를 원합니다. 친구라든지 연인관계라든지 그런 건 상관치 않습니다. 전 75살이지만 매력적이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입니다. 박물관장을 지냈고 집을 좋아합니다. 정원도 좋아하며 파티도 좋아합니다. 그리고 강아지 잭 러셀과 산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180cm에 72kg입니다. 저는 마르고 흰머리에 푸른 눈을 가졌고 가슴에 털이 있습니다. 전 베푸는 것을 좋아하며 사랑받는 것도 좋아합니다. 전 아주 멋진 집을 갖고 있습니다. 먹을거리가 가득하고 친구들이 있으며, 제가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늙은 남자라도 괜찮다면 한 번 만나보는 게 어떻습니까? 어떻게 될지 한 번 봅시다.


 75세의 나이에 병과 싸우는 사람이 쓴 자기소개서라고 하기엔 새로운 만남,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차있지 않나요? 그리고 안나는 말하죠. 할은 포기하지 않았다고. 비록 은퇴하고 병마와 싸우는 몸이지만 올리버의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을 최고로 즐기다 가기 위한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올리버와 안나의 고민은 할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네요. 인생 막바지에도 시작을 꿈꾸던 할의 모습에 잠시 멍해진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올리버의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걸터앉아 얼굴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묻습니다.



 -올리버: 이제 어쩌지?

 -안나: 나도 모르지.

 -올리버: 우리는 어떻게 될까?

 

 

 



데이지를 건네는 마음으로


 플래시백 중 올리버의 어머니가 안방에 걸어두었던 꽃 사진이 등장하는데요, 올리버는 그 사진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어렸을 땐 사진 속의 꽃이 내가 어머니에게 데이지를 주는 것인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진 속 손은 어머니가 내게 데이지를 주는 것 같다. 어머니가 꽃을 주며 말하길 “이건 간단하고 행복하지 않니. 이게 내가 네게 주고 싶은 거란다.”



 데이지의 꽃말은 희망, 천진난만, 아름다움, 순수한 마음입니다. 시작이 두려운 이들도 데이지를 건네는 간단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용기를 낸다면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요. 둘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올리버가 호텔 방에서 안나에게 붉은 꽃을 건네던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안나와의 관계는 물론이거니, 다른 종류의 시작도 가뿐하게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From. 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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