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이 나를 대신해 말해주오.
앞서 작성한 10화 편에서 대기업, 요즘 잘 나가는 브랜드를 따라 소셜미디어를 운영했다가 산으로 갈 수 있는 함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작은 회사가 재미없는 인스타그램, 소셜미디어 채널을 운영하는 이유에는 10화에서 언급한 부분도 있지만 또 하나 무시하지 못할 요인이 있다.
바로 컨텐츠/리소스의 부족.
큰 마음먹고 포토그래퍼, 스튜디오 빌려서 찍은 상품 사진 몇 장으로 아무리 돌려먹기를 해봐도 원본 소스가 똑같은데 참신하고 다양한 컨텐츠가 나올 수 없다. 작은 회사에 만일 디자이너가 있다면(그마나 다행이다 - 프리랜서 디자이너를 쓰기도 하기 때문에) 그 디자이너는 온갖 디자인 작업 + 잡일까지 도맡아 할 것이다. 안 그래도 현타 오는 상황인데, 한정된 리소스로 뭔가 새로운 디자인이 탄생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폰트를 바꾸어보고, 레이아웃을 바꾸어보아도 그 컨텐츠가 그 컨텐츠다. 그런 압박 속에서 작업해야 하는 디자이너를 보고 있으면 마케터인 내가 괜히 더 미안하고 안쓰러울 지경이다.
거기에다가 추가로 내가 일했던 회사는 한국회사였고, 주 타깃 마켓은 독일이었다. 모두가 한국인이었고, 내가 그나마 독일어 C1 자격증을 가지고 있어서, 독일어를 읽거나 써야 하는 상황이 되면 다들 나에게 요청하고는 했다. 말이 C1(독일어 자격증은 A1-C2까지 있고, C2가 가장 높은 레벨)이지, 독일에 와서 산지 3년이 채 안된 사람이 독일 마켓을 상대로 독일어 컨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요즘에야 Chat-GPT가 있다지만(나의 구세주!), 그때만 해도 그런 것은 없었다.
이전에 메타 광고 및 잡지 광고를 게시한 것을 보니 더욱 가관이었다. 원어민이 아닌 독일어 배운 지 3년 차인 내가 봐도 한눈에 보이는 잘못된 표현과 철자오류까지! 그런 광고를 엄청난 돈을 주고 지면 광고에 올라오게 했다니.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하긴 독일어 원어민이 없는데, 누가 실수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이해가 가면서도, 그래도 그렇지 싶었다. 주변 독일인한테 검수를 좀 부탁해 보지. 아니, 정 못하겠다 싶으면 그냥 독일어 광고를 하지 말지.
글쓰기를 좋아하고, 글쓰기로 잘 먹고살 수 있는 직업이 마케팅인 것 같아 마케팅을 시작했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직접 독일어로 컨텐츠를 만들고, 마케팅 텍스트를 작성하는 것은 무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인에게 검수를 받는다 해도, 매번 그 프로세스가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야 자신있지만 그때만 해도 독일시장을 잘 모를 때였기 때문에, 독일 소비자를 상대로 컨텐츠를 기획하고 만들 자신이 없었다. 분명 뭔가 핀트가 안 맞거나, 그들의 관심사를 자극하지 않거나, 어색하고 이상하거나. 아니면 이 모두 다 이거나.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솔루션은?
제목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인플루언서 마케팅.
인플루언서들이 나를 대신해 말해주는 작전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다.
돈이 없다는 것. 마케팅 예산이 0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쩔 수 없다.
마이크로 인플루언서에 집중하는 수밖에. 심지어 나노 인플루언서까지도 협업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들을 상대로 "시딩 캠페인(Seeding Campaign)"을 진행하자.
당시에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예산만 충분하다면 당연히 마이크로 인플루언서보다는 매크로나 메가 인플루언서와 협업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믿었다. 팔로워 수가 많다는 것은 곧 더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규모가 큰 인플루언서일수록 ‘분명 더 좋은 성과가 날 것이다’라는 확신에 가까운 기대를 가지고, 많은 이들이 인플루언서 마케팅을 운영하곤 했다. 여기서 내가 과거형을 쓰는 이유는, 요즘은 인플루언서 마케팅의 판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뒤에서 더 자세히 다뤄보겠다.
참고로 업계에서 인플루언서는 다음과 같은 팔로워수 기준으로 나뉜다.
10k 이하: 나노
10k-100k: 마이크로
100k-1M: 매크
1M 이상: 메가
유럽 시장에서 "시딩 캠페인(Seeding Campaign)"이라고 부르는 이 캠페인은 제품을 인플루언서에게 무상 제공하고 상품 관련 컨텐츠를 업로드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예산이 없으니 내 결정이라기보다는 자의 반 타의 반 떠밀려서 한 결정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마이크로 인플루언서에게 집중한 것은 엄청난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독일 소비자들이 관심 있어할 만한 UGC 컨텐츠가 쏟아져 나왔고, 그들의 컨텐츠를 회사 인스타그램 채널에 리그램 해서 올렸다. 기업이 우리 제품이 이러이러해서 좋아요 라는 컨텐츠를 아무리 올려봐야, 제품 파는 사람이니 당연히 자기 제품을 좋겠다고 하겠지 하고 대부분의 소비자는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인플루언서가 만든 자연스럽고 리얼한 컨텐츠에 소개되는 상품은 그 효과가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면 최대한 많은 마이크로 인플루언서를 상대로 씨를 뿌리듯 제품을 뿌려대면서 시딩 캠페인을 진행하면 무조건 성공할까?
뿌린 만큼 거두는 법칙이라면 좋겠지만, 마케팅은 결코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
간혹 "숫자"에만 집작하는 경영진들이 '예산을 많이 투자하면 당연히 결과가 잘 나오겠지', 또는 '많은 인플루언서들과 일하면 그렇게 투자한 만큼 결과가 무조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며 마케터들을 압박하고는 하는데, 그건 정말 아니다.
그렇게 '많은 투입 = 좋은 결과'로 확정 지을 수 있는 로직이라면 다들 없는 돈을 대출해서라도 마케팅 예산을 늘리지 않겠는가.
그냥 남들 하는 것 따라서 대충해서는 마이크로 인플루언서 시딩캠페인으로 결코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시딩캠페인이 성공했던 이유를 뽑아보자면,
1. 컨텐츠 작업의 자유를 보장해주었고, 진성정 담긴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인플루언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힘썼다.
여기서는 독일 시장을 잘 모르는 것이 오히려 약이 되었다.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 컨텐츠를 만들지, 무슨 내용을 넣을지 등을 전적으로 인플루언서에게 일임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보다 독일 소비자들을 더 잘 알고 있을테니까. 덕분에 정말 다양하고, 가식적이지 않은 컨텐츠가 나왔다. 인플루언서 마케팅 컨텐츠를 접할 때, 종종 인플루언서들과 채널만 다르지, 같은 상품을 두고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한다. 업체에서 적어준 문장일 것이다. 제품 소개할 때 이 문장은 무조건, 꼭 언급해야 한다고 당부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준 스크립트를 읽는 컨텐츠는 아무리 광고인줄 감안하고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건 정말 아니지 않나?' 하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정도면 그냥 기업이 우리 제품 좋아요 광고하는 것이랑 별반 차이가 없다. 전달하는 사람의 입만 다를 뿐. 물론 자유를 주면, 실망스러운 컨텐츠가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원하는 결과물/컨텐츠를 얻기 위해서는 인플루언서와의 커뮤니케이션 역시 정말 중요하다. 진실된 커뮤니케이션을 기반으로 신뢰를 쌓고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내야한다. 인플루언서 마케팅 적임자를 찾는 채용 공고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우수한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뛰어난 처세술인데 괜히 이런 자격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다.
2. 진짜 우리 제품을 좋아하는 또는 좋아할 만한 사람들과 협업을 진행했다.
혹시 회사에서 갑의 입장에 있다면, 마케터나 마케팅 에이전시에게 '한 달에 10명씩, 6개월 동안 60명의 인플루언서와 시딩 캠페인을 진행하라' 라는 명령을 내리지 말기를. 60명이라는 숫자를 채우는 것은 어찌 보면 가장 쉬운 일이다. 노동력과 시간만 들이면 된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 인플루언서가 과연 우리 제품을 얼마나 매력적으로, '맛깔나게' 소개하느냐이다. 그리고 너무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 제품을 좋아하는 사람, 좋아할 만한 사람, 정말 자주 애용할 만한 사람일수록 더 맛깔난 컨텐츠가 나온다. 진심이 담긴 컨텐츠는 소비자들이 놀라울 만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다. 모바일이라는 매개체를 사이에 두고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람들은 일종의 ‘식스센스’를 발휘해 진짜와 가짜를 정확히 구분한다. 똑같은 문장을 말해도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그 안에 진심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전해지는 온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래서 인플루언서 마케팅은 결국, 아무리 돌아가도 ‘진정성’에 귀착된다.
나도 인플루언서를 진정성 있게 대해야 하고, 인플루언서 그 사람 자체도 진정성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 인플루언서가 만드는 컨텐츠에도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이 삼박자가 모두 갖추어지면, 시딩 캠페인은 폭발적인 부스트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