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내가 AI보다 잘할걸?

가짜 인플루언서, 진짜 인플루언서

by yein

지난해 연말, 나는 AI라는 주제에 꽤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최근 관심사를 내 베프보다, 남편보다 더 빨리 알아차리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은 나에게 AI 관련 콘텐츠를 계속해서 사정없이 보여주었다.


AI 때문에 미국에서 벌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는지,
앞으로 우리의 일자리가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 등등


한참 이러한 콘텐츠를 소비하고 나니, 내일 당장 내 일자리가 없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그 알고리즘의 지옥이 가져다준 부정적인 생각에서 금방 벗어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민과 걱정의 시간, 그리고 AI 덕분에 그동안 일을 하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해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던 나만의 강점을 발견했다.


이야기는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 마켓을 상대로 처음 마케팅을 하던 때였다. 그동안 한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마케팅을 해왔고, 유럽 마켓은 처음이었기에 걱정이 많았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가 내가 내민 제안은 한국 사람으로 구성된 이 작은 한국 회사가 직접 유럽 소비자 감성에 맞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여러모로 쉽지 않으니, 현지 인플루언서를 활용해 콘텐츠를 생산하자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인플루언서 마케팅을 한다고 하면 무조건 팔로워가 많은 인플루언서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도 효과만 보장된다면 인플루언서에게 어느 정도의 예산을 쓸 준비는 되어 있었다.

그리고 후보로 좁혀진 인플루언서는 독일에서 거의 인플루언서의 시조새 같은 존재, 즉 1세대 인플루언서로 불리는 남녀노소 모르는 사람이 없는 두 명의 스포츠 분야 인플루언서였다.


이 두 사람의 프로필과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면 또 할 이야기가 한 더미라 일단 그 내용은 생략하겠다. 나는 그 두 명의 인플루언서에게 연락을 했고, 놀랍게도(이것도 내가 이메일을 기깔나게 쓴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ㅎㅎ — 이건 어쩌면 챗GPT가 어느 정도는 따라 할 수 있으려나?) 두 사람 모두 처음 들어 보는 이 한국 회사의 협업 제안 이메일에 답장을 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중 한 명으로 추렸는데, 최소 협업 금액이 1억 원이었다. ㅎㅎ

그렇다, 1억 원.
우리는 사실 큰 마음먹고 1억 원을 지불할 의사는 있긴 했지만, 나는 협상이 진행될수록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투자해서 성과가 안 나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보다 그냥 마음이 영 가지 않았다.


그 인플루언서는 팔로워 수도 독일 탑에 들 정도로 많았고, 인지도도 높았다. 콘텐츠 퀄리티도 좋았고, 모든 콘텐츠의 조회수와 ER(댓글, 좋아요 같은 참여도)도 높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 인플루언서의 콘텐츠를 보면 볼수록 그 느낌이 커졌다.

팔로워 수가 이렇게 많은데, 콘텐츠 퍼포먼스 데이터가 이렇게 좋은데...

이건 그냥 내 개인 취향, 느낌이겠지 싶었서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냥 뭔가 자꾸 끌리지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그냥 모든 것이 가짜 같았다.

그래서 나는 결국 협업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해온 어느 인플루언서가 있었다.

인플루언서라고 말하기도 조금 애매하고, 그냥 인스타그램 채널을 운영하던 일반인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겠다. 팔로워 수는 내 기억으로 2,800명 정도였다.

그런데 그의 콘텐츠에는 진정성이 넘쳤다. 그의 평소 라이프스타일과 하고 있는 일 역시 우리가 판매하는 제품과 더 결이 맞았다.

궁금해져서 이메일 답장을 보냈더니 그는 화상 회의를 하자고 했다.
30분 남짓한 화상 회의에서 나는 그의 열정을 보았다.


AI는 절대 보지 못할,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열정’.

그래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 우리가 잃는 것은 고작 상품 하나였으니까 — 그와 협업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유명 인플루언서에게 쓸 뻔했던 1억 원을 우리에게 오히려 정기적으로 가져다주는, 아니 단지 세일즈 금액 만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성과를 우리 비즈니스에 가져다주었다.


AI라면 절대 이 3,000명도 되지 않는 인플루언서와의 협업을 추천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데이터에 의존해 결정을 내리는 AI는 결코 나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AI는 내가 함께 일한 인플루언서들의 열정과 잠재력을 느낄 수 없다.

이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AI는 알 수 없다.


이건 오로지 사람, 식스센스를 가진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 그리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의사결정이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AI가 내 일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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