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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윤 Mar 31. 2024

살아있음에 감사함을 알게 해 준 오분자기 뚝배기

모두의 위로가 가득 담긴 한 뚝배기의 사랑이었으니깐/위로의 해장국

 스물아홉, 세간에서는 아홉수라는 표현으로 숫자 9가 들어가는 나이는 불길하니 매사 조심하라고도 한다. 하지만 나의 스물아홉은 황금기였다. 겁도 없이 첫 사업을 시작했다. 사실 사업이라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분식집을 운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배짱이지 싶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한 터라 제법 살림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주변에서 음식이 맛있다. 아이들 간식을 잘 만든다. 소풍 때는 내 김밥을 기다린다면서 나중에 김밥집을 해보라 등등의 얘기를 자주 들었다.


 세뇌 교육의 효과였을까?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가 김밥을 싸면 잘 팔릴 것이라는 확신으로 창업에 도전한 것이다. 처음 창업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이 비슷하다고 한다. 나는 다를 거다. 내 제품은 다르다. 그렇게 시작한 내 첫 사업은 제법 성공적이었다. 소풍 시즌이나 연휴 시즌이면 설거지할 틈도 없었다. 당장 음식을 담을 그릇이 없어 판매를 못하기도 했다. 요즘 말하는 오픈런이라는 걸 해야 먹을 수 있는 맛집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사연이 많다. 그중 하나는 첫 오픈 날이었다. 수없이 말아봤던 김밥이었지만 손님들이 대기하면서 보고 있는 가운데 마치 쇼를 하듯 김밥을 마는 상황이 몹시 당황스러웠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꾹꾹 눌러 만 김밥이었는데 손님이 집에 가서 보니 속이 엉성했나 보다. 김밥을 들고 찾아오셔서 “이래서 장사하겠냐.”며 윽박지르시는데 머릿속이 하얘지고 서럽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사실 내 잘못이 맞긴 하다. 그런데 그때는 그렇게까지 사람들 많은 데서 언성을 높일 일인가 싶어 내심 서운하고 속상하기만 했다. 덕분에 심기일전해서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 어느새 김발도 필요 없이 손으로 드르륵 말아내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루하루 몸은 고되지만 돈 버는 재미에 신이 났었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영원한 건 절대 없었다. 내 가게가 잘 되자 곳곳에 비슷한 콘셉트와 비슷한 가격대의 가게들이 줄지어 생기기 시작했다. 심지어 100m 근처에까지 말이다. 무턱대고 시작한 사업이니 대책 또한 없었던 터다.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다. 이 시기가 어쩌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첫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고민의 끝은 이랬다. 지금의 이 사업으로 평생 먹고살 수는 있겠지만, 나는 절대 성장이라는 걸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또다시 용감한 결정을 하기로 했다. 지금 사업을 그만두고 공부를 더 해야겠다. 그렇게 첫 사업을 마무리했다. 이미 인지도가 있던 가게라 다행히 계약기간에 맞춰 인수인계를 잘 마쳤다.     


 의지가 강한 편이 아니었기에 마음이 변하기 전에 서둘러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첫 사업의 성공은 나의 노력보다 감사하게도 운이었다. 그렇기에 다음 사업을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와 공부가 필요했다.  나는 바로 요리학원에 등록했다. 기본에 충실하고 싶어서 한식조리기능사부터 도전했다. 그렇게 취득하기 시작한 자격증이 하나둘씩 늘면서 요리 관련 자격증은 물론 제과제빵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총 일 년 여의 시간 동안 아침에 출근하듯 나가서 저녁에 들어왔다. 지금도 그때의 열정을 다시 되살리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모든 요리 관련 자격증을 마스터하는 과정에서 제과제빵 쪽에 더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때마침 제과제빵 스승이라는 분께서 요즘 말하는 창업 컨설팅을 해주신다고 했다. 나는 또 용감하게 앞뒤 재어보지 않고 동네 빵집을 오픈했다. 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이라 건강한 밀가루와 재료를 사용한 건강빵들이 필요했고, 또 그런 고객들이 많을 거라 예상했다. 시장조사라는 것도 없이 오로지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그 시절에는 건강한 우리 밀가루의 식감은 익숙하지 않았다. 매장이 아파트 단지 상가였고, 학교 앞이라 단골 고객이 많을 거라는 기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예상밖의 경쟁 상대가 꽤나 많았다. 나의 경쟁 상대는 샌드위치 전문점, 튀김집, 김밥집, 붕어빵, 호떡집 등등 무수히 많았다. 그뿐만 아니었다. 뉴스에서 연일 설탕과 밀가루 가격의 폭등에 대한 뉴스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러 가지 악재들 속에 그렇게 나는 원치 않는 폐업을 해야 했다. 사실 열심히 공부했다고 자신만만했던 자만심이 부른 악재들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스승이라는 분은 제자를 통해 자신만의 이익을 취하셨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느낀 배신감은 이루 말로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하루가 다르게 금전적으로 힘들어져 가는데 차마 가족들에게는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번 돈이라며 큰소리 떵떵 치면서 오픈한 가게인데 이렇게 망해간다고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있는 지인 없는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보려 전화를 돌려보았다. 아무 소용없었다. 그 시절 힘든 건 나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내가 이렇게 신의가 없는 사람인 건가 싶어서 자존심도 상했다.      


 직원들에게 내색도 제대로 못하고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야말로 눈물 젖은 빵을 많이도 먹었던 때였다. 거의 매일 재료 창고에 들어가 숨죽여 울다가 나오곤 했다. 눈물이 터질 때면 마땅히 숨을 곳이 창고밖에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때 나는 세상을 등지려고도 했다. 매일 3~4시간 자면서 김밥 말아 벌었던 그 많은 돈을 한순간에 날려버렸으니 말이다. 내 모든 게 사라진 것만 같았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나는 철없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 문을 닫는 날 가족들에게도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잠수를 타 버렸다. 맥주 6캔을 사 들고 무작정 어느 모텔에 들어갔다. 핸드폰을 꺼버리고 오락 프로그램을 틀어놓은 채로 맥주를 연거푸 마신 후 그대로 잠이 들었다.     


 죽고 싶은 심정으로 무작정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던 순간의 선택이었다. 가족들에게는 대형사고 같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모두에게 미안했지만 죽고 싶은 심정이면서 또 살고 싶었기에 한 선택이기도 했다. 바로 다음 날 아침에 가족들 앞에서 석고대죄를 했다.


 다행히도 나를 믿었던 가족들이 가출 신고는 하지 않아서 대대적인 민망함은 피할 수 있었다. 또 역시 가족밖에 없구나 싶었던 것이 그간의 마음고생을 이해해 주고 위로해 주었다. 참으로 철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가족족들에게 정식 허락을 받고 다시 마음을 추스르려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결혼 후 처음으로 여행을 간 곳이 제주도였다. 고등학교 때 친구 셋이서 함께 떠난 여행이었다. 재잘재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간의 시름을 더 빨리 을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제주도에서 먹은 첫 음식이 오분자기 뚝배기였다. 들큼하기도 하고 짭조름하면서 쫄깃하게 씹히는 작은 전복이 신선한 해산물 향과 함께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맛이었다.


 갑자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 살아있어서, 가족들이 있어서, 친구들이 있어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그저 감사했다. 그때의 오분자기 뚝배기 맛과 그 느낌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맛이고 기억이다.    

 

 지금도 제주도에 가면 나는 무조건 오분자기 뚝배기는 꼭 먹고 온다. 물론 지금은 갈치회, 고등어회와 찜도 먹고 제주흑돼지 오겹살에 한라산도 한 잔 마신다. 그래도 나는 언제나 제주도 음식 중 일 순위는 오분자기 뚝배기다.


그 시절 모두의 위로가 가득 담긴 한 뚝배기의 사랑이었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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