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장라이프
해장국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술과 안주, 숙취가 함께 떠오른다. 그러다 술의 종류에 따라 안주도 달라지고 숙취의 정도도 달라지리라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일 것이다. 술과 안주를 좋아하는 지금의 나는 술에 관련된 모든 것을 좋아한다. 예를 들면 술을 직접 만들어 본다거나 술의 종류에 맞는 음식을 맞춰본다거나 참새의 방앗간 같은 주류점에 가서 시음을 하고 구매를 하고는 한다.
조금 더 젊었던 시절의 나는 맥주 마시는 술친구, 소주 마시는 술친구, 와인 마시는 술친구, 막걸리 마시는 술친구, 안주를 좋아하는 술친구 등 각기 다른 술친구들이 많았다. 자랑이 아닌 걸 알지만 365일 중 300일 정도는 술과 함께였던 날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체력도 체력이거니와 주량도 타고났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당당하게 주량을 타고났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주량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기억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면 술과 아버지에 대한 대략 난감한 웃픈 사연이 자리 잡고 있다. 예닐곱 살 즈음의 기억이다. 술이 뭔지, 아버지와 동네 아저씨들의 한숨 소리가 무엇 때문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나이였다. 저녁이면 아버지는 나의 작은 손에 지폐 몇 장과 주전자를 들려 막걸리를 받아오게 하셨다. 너무 희미한 기억이라 어느 곳으로 술을 받으러 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 손에 막걸리 주전자가 자주 들려있었던 건 정확히 기억한다.
그런 날이면 나는 그저 신이 났다. 아버지가 주신 잔돈으로 동네 슈퍼에서 파는 생도넛과 팥앙금롤을 사 먹을 수 있어서였다. 평상시에는 구경도 못 할 간식거리였다. 형편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4남매의 가정에서 이런 간식은 연중행사 같은 날이나 아버지가 잔뜩 취하신 날에나 가능했다. 사실 동생들은 아직 생도넛의 참맛을 잘 모를 나이였으니 나름 나만의 특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철 모르는 어린이의 막걸리 셔틀은 몹시 즐겁기만 했다. 문제의 그날이 오기까지는 말이다. 그날도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주전자를 들고 나섰다. 무거워진 주전자와 내 손에 쥐어진 잔돈을 들고 동네 슈퍼의 생도넛을 생각하며 신나게 걸어갔다. 그러다 그 모습 그대로 하수도 공사하는 곳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 시절의 많은 기억이 사라졌지만, 그때 그 순간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짧은 인생에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공포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가뜩이나 어두운 골목길에서 떨어진 하수도는 더욱더 어둠이 가득했다. 소리라도 질러야 했건만 황당함과 급습한 공포감에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나를 찾는 동네 아저씨들과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서야 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러댔다. 하수구 밑에서 들려오는 내 목소리에 놀라 아버지와 아저씨들은 다친 곳이 없는지부터 물었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지만 정말이지 나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아버지는 나를 꺼내 주려 하셨지만 이미 만취 상태라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버거워하셨다. 보다 못한 다른 아저씨가 내려와서 나를 지상으로 올려주셨다. 그때도 나는 막걸리 주전자와 잔돈을 손에 꼭 쥔 채였다. 어쩌면 그때의 기적은 생도넛에 대한 나의 의지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일 때문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아버지는 그 이후로 술을 완전히 끊으셨다. 그렇게 나의 막걸리 셔틀도 영영 막을 내려버렸다.
어렸던 나는 이제 나만의 달콤한 간식시간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몹시 슬펐다. 한편 나는 한참 동안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때 나를 건져준 게 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고 다른 어른들이 더 위험해 보인다며 만류하셨기 때문이라지만 당신의 딸을 위험한 상황에서 건져내지 못하는 모습에 두고두고 실망스러웠다. 또 한편으로는 보호받고 있다는 믿음에 대한 신의가 깨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을 정의 내릴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든든했던 아버지에 대한 믿음에 금이 간 건 사실이다.
어른이 된 후 그날의 기억을 살포시 아버지께 꺼내 보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저 모르쇠로 일관하셨다.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모르시는 것 같진 않은데 말이다. 이해해 드리기로 했다. 아버지 입장에서도 그날의 기억이 썩 유쾌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아버지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면 용서해 드릴게요.
아버지의 금주와 해장국과는 상관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술을 드시지 않는 지금도 여전히 해장국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해장국을 먹을 때면 자꾸 아버지가 떠오른다. 타고난 효녀는 아니어도 희한하게 해장국 앞에서는 효녀 모드가 되어버린다. 결국 나는 또 양손 가득 포장된 해장국을 들고 부모님 집으로 돌아간다. 어쩌다 보니 어릴 적 막걸리 셔틀이 해장국 셔틀까지고 이어져오고 있는 셈이다.
지금은 내 손에 잔돈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오히려 내 돈을 쓰고 있지 않은가), 맛난 디저트를 먹을 수 있다는 희망도 없다. 하지만 해장국을 맛있게 드시는 부모님의 행복한 표정에 마음이 편안해지기는 한다. 어쩌면 해장국 셔틀을 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날이 올 테니 할 수 있을 때 오늘도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