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뮤지컬 <돈 카밀로 앤 페포네>
테클렌부르크는 의외로 지역구 관광도시로 약간은 이름이 알려진 아주 작은 중세 마을이다. 내가 살던 도시인 오스나브뤼크에서 그다지 멀지 않지만, 가는 길이 난해하기 짝이 없다. 교통편을 찾아보는 순간부터 6월과 8월에 표를 각각 한 장씩 끊어놓은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여름에만 거기까지 운행하는 버스가 하루에 서너편 있는데, 저녁 6시가 막차다. 가장 가까운 기차역은 테클렌부르크에서 6km 떨어진 레히팅엔이다. 차가 있거나, 남들 다 있는 차 있는 가족이 있거나, 같이 갈 차 있는 친구라도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그 중 하나도 없다. 면허증만은 있어서 렌터카라도 빌려야 할까? 고민을 해 보기엔 너무 오래 장롱면허로 면허를 묵혔다. 두 장의 티켓 중 첫 공연이 주말이고, 집에서 극장까지의 거리가 20km 정도이니 그럼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 나가 보면 되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당일치기를 계획했다. 자전거를 타고 극장까지 간 다음, 공연이 끝나고 6km를 달려서 레히팅엔에서 기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계획이었다. 이 얘기를 동네방네 다 하고 다녔는데 이 말을 들은 모든 한국인은 20km를 어떻게 자전거를 타냐고 기겁했고 모든 독일인은 20km 정도면 가볍게 다녀올 만 하지 하고 말했다.
길 잃는 게 두려워 구글맵이 안내해주는 수상한 길과 자전거가 찍힌 지역 표지판을 보고 고민하다 구글을 따라가 보기로 했고 큰 교훈을 얻었다. 구글은 산 넘고 물 건너는 경사와 포장 상태를 하나도 고려하지 않은 어쨌거나 평면 지도상으로 가까운 루트를 추천해 주었고, 어쨌거나 공연 5시간쯤 전에 집에서 나왔으므로 공연 시간 전에는 도착하려니 하고 천천히 달리고 또 자전거를 밀면서 걸었다. 아름다운 여름날에 햇살을 받으며 끝없이 펼쳐진 밭을 보며 달리는 게 무엇이 무서우랴. 그렇게 중간중간 길도 잃고 멈춰서 사진도 찍고 내려서 자전거를 끌어 가며 두시간 반만에 인구 9,600명의 테클렌부르크에 도착했다.
이 산 꼭대기 중세 마을은 정말... 산이었고 마을이었다. 일단 떨어진 당을 파르페로 보충하려고 앉아있는데 옆에 앉은 동네 할아버지들이 지나가는 사람과 막 대화를 나눈다. 워낙 작다 보니까 그냥 아는 사람이 막 굴러다니는 그런 동네인 것 같았다. 하지만 딴에 관광지 코스프레를 하느라 무슨 박물관도 있고 외지인에게도 친절하고 중세 답지 않게 ATM도 있다. 혈당을 올리고 적당히 싸온 음식을 주워 먹고 극장에 입장하는데, 사람들이 심상치 않다. 극장을 향하는 모든 사람들이 방석이며 담요 같은 걸 바리바리 싸 든 가방을 하나씩 짊어지고 있다. 심지어 그 앞에서 방석을 팔고 있다. 불안했지만 일단 플래그를 무시하고 극장에 들어섰다.
역시 동네 고인물들을 무시해서는 안 됐다. 편안한 극장좌석에 익숙해진 도시인은 이런 야생의, 각 나무 판자 조각이 서로 거리두기 하는 중인 의자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자전거 위에서 두시간 반 시달린 가엾은 내 엉덩이는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하게 생겼다. 해가 떠 있는 동안은 날씨가 춥지 않지만 해가 지고 나면 급격하게 기온이 떨어질 것도 분명했는데, 추가로 걸칠 것을 가지고 오지도 않았다. 일단은 겉옷을 깔고 앉아 버텨보기로 한다.
뮤지컬 <돈 카밀로 앤 페포네> 중 돈 카밀로가 마을 주민들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 부르는 솔로곡 <36개의 집 36 Häuser>
공연은 야외극장 공연을 처음 봤다는 것만으로 의의가 있었다. 처음 등장 신에서 극의 나레이터 역을 하는 두 사람이 차를 타고 등장하고, 어떤 출연자는 무대 저 뒷편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와서 내리고, 극장의 일부인 외벽 위 지형지물들도 아낌없이 이용하는데, 이렇게까지 무대를 넓게 쓰는 작품을 본 적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2017년 초연 작품인 주제에 작품에 딱 두 명 나오는 식자층인 젊고 예쁜 여선생님을 두 번 죽었다 깨어난 86세 할아버지랑 결혼엔딩을 내는 것이 불만이었고, 어디서 이미 많이 본 부모자식에게 저항하는 말 안 듣는 자식 구도는 약간 미하엘 쿤체가 생각 가능한 갈등/억압/저항 구도는 세상에 이거밖에 없는 걸까 약간 고민하게 만들었다.
1막 마치고 쉬는 시간즈음부터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해서, 2막 마지막 부분에선 그 극의 유일한 어둠 부분이 있었다. 조명도 다 꺼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유일한 시간. 8시에 시작한 공연은 11시에 끝이 났다. 자 이제 공연 내내 기다려온, 대망의, 가장 난이도 높은, 집에 가는 구간. 자전거를 끌고 어두운 산길을 어찌저찌 내려왔다. 이제 레히팅엔까지의 6km 거리를 달려,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면 된다. 그런데 세상에, 인도도 자전거 도로도 없는 길에 가로등이 하나도 없네. 도시 촌놈이 또 촌을 간과했네.
독일 자전거는 반드시 앞뒤로 불을 달아야 하고, 밤에 불을 켜지 않고 달리는 것은 경찰의 단속 대상이 된다. 당시 내 자전거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 발전이 되어 켜지는 조명이 고장이 나서 다른 충전 되는 등을 찾아서 달아 둔 상태였다. 그런데 그게 또 마침 배터리가 나가 버리네. 다행이 폰 보조 배터리를 들고 나가 보조배터리를 꽂고 달렸다. 제발 역에 도착할 때까지만 보조배터리로 불 켜고 달리기가 가능하기를 빌면서. 어찌저찌 작은 역에 도착했고, 독일 기차역엔 전부 엘리베이터가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배신감을 느끼며, 막차인 다음 기차가 올 때까지 한 시간을 폰을 보며 기다렸다.
오스나브뤼크에 새벽 한시에 도착하고 나니 가로등이 환히 밝혀지고 이 시간에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모습에 다시 인류문명에 편입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쨌거나 살아서 집에 돌아오긴 했는데, 이런 짓은 살면서 한 번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또 이 짓을 할 엄두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길이랑 흐름 상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