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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영혼 May 08. 2020

끝이 없을지도 모를 시작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이 더 미약하면 어때~ 시작하는 모든 이에게 박

  2010년 2월 26일, 김연아 선수가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220점이 넘는 어마어마한 점수로 금메달을 딴 날이다. 같은 날, 나는 오전 11시에 길었던 나의 박사과정에 마침표를 찍는 졸업식에 참석했다. 가족, 친구들과 점심 식사로 짜장면을 먹은 후 입속에 양파 냄새가 채 가시기 전에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두 개의 커다란 여행가방과 함께... 


  김연아 선수처럼 세상에 이름을 알리겠다는 야무진 꿈을 품고 떠난 것은 아니고 박사 후 과정 연구원으로서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박사과정 후반도 그랬고 미국으로 가는 여정도 모두 전혀 예상치 못 한 상태로 진행이 되었다. 인생이 어디 내 맘대로 되겠냐 만은 미국에서 살아보리라 하는 큰 줄기만 품고 있었지 나머지 잔 가지들은 모두 신이 정하 신대로 정신없이 따라갈 뿐이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미국 동부에 위치한 치과대학원의 신경과학 연구소에 시차 적응 따위 없이 미국 도착 이틀 만에 출근을 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살아보겠다는 막연한 그렇지만 확고한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마 20대였던 것 같다. 앞선 글에서도 밝혔지만 언니가 이미 프랑스에서 10여 년째 살고 있었고 항상 언니가 최고인 엄마에게 나도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나도 어딘가로 떠나 살고 싶었다. 외국어 하나 유창하게 구사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내 연구분야의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서 경험을 쌓는 추세라 주저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일자리가 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나의 시작은 2010년이 아닌 내가 석사과정에 입학하던 2002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박사과정 중 2007년에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세계적인 학회에 참석했을 때 마음을 굳혔다. 내 연구결과 발표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이국적인 분위기, 버스에서 흘러나오던 재즈 음악 그리고 그 재즈음악에 그루부 타던 버스 기사 아저씨. 여자에게 세상 친절한 남자들. 내가 들어갈 때까지 문을 잡아 주고 무겁지도 않은 내 여행가방을 손수 내려주고 들어주던 이름 모를 그 사람들. 그때 박사과정 5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20리터는 족히 넘는 증류수를 꿋꿋하게 옮기던 숱한 날 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래, 내가 살 곳은 이 곳 이구나' 싶었다. 미국에서의 학회에 참석할 때 기특해하시고 기뻐하시던 부모님만큼이나 나도 기뻤다. 


  그리고 졸업이야 내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박사 졸업이라는 목표를 두고 1년 동안 박차를 가하던 2009년 6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아빠가 돌아가셨다. 중환자실에서 의식 없이 한 달을 계셨는데 박사과정 졸업이고 뭐고 간에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가 꼬박 한 달 동안 아빠 옆에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다. 서울에서 실험이 손에 잡힐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지도 교수님의 배려로 가능한 일이었다. 중환자실 옆에 위치한 보호자실 -말이 보호자실이지 아무것도 없이 그냥 널따란 방만 있었다-은 30여 명이 한꺼번에 먹고 잘 수 있는데 유일한 가전제품, 전화기 한 대가 놓여 있었다. 그 전화벨 소리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 보호자 대기실에서 딱 한 달이 되던 날 밤, 어둠을 가르던 전화벨 소리와 어둡고 긴 복도를 뛰어갔던 그 발걸음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곳에서 여름을 보냈고 그렇게 아빠도 보내 드렸다. 여전히 무더운 여름 서울로 올라가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했다. 밀린 실험을 다시 시작해야 했고 원궤도로 돌아가려니 쉽지 않았다. 실험하랴 논문 쓰랴 박사과정 디펜스 하랴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아빠를 보내드린 슬픔에 젖어 있을 새가 없었다. 졸업을 몇 달 앞두고 가고자 하는 연구소에 이력서를 넣어야 하는데 그때 마침 우리 연구실에서 세미나 초청을 받으신 분의 소개로 미국의 연구소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마침 전공도 정확히 나와 일치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하늘이 내린 선물이란 생각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냥 바로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으나 당장 비행기표를 살 거금도 없었다. 그러나 내 형편을 듣고 연구실 후배가 선뜻 돈을 빌려주었고 최대한 저렴한 비행기 티켓을 위해 엘에이 공항에서의 10시간 환승시간을 선택했다. 실험 데이터 분석이며 연구에 필요한 랩탑도 지인이 사주었으니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였던 박사 마지막 학기는 마치 미국으로 얼른 떠나라는 하늘의 계시 같았다. 너의 30대를 새로운 곳에서 시작하라는 그런 계시 말이다.


  나처럼 외국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 분야에서 성공해서 좋은 직장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텐데 웃기게도 나는 출국하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 거야'라는 나름의 의지 같은 게 있었다. 그리고 그때 걸려든 것이 지금의 남편이다. 미국에 온 지 일주일 만에 만난 남자와 2년 후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 2년이란 시간이 보통의 박사 후 과정 연구원에게는 피 터지는 연구를 할 시간인데 나는 코피 나게 연애를 했다. 그 남자와의 시작도 전혀 예상치 못 하게 일어났다. 지금의 남편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나올 때 도움을 받은 분께 감사 인사를 하고자 만난 장소에 그분을 따라 나온 같은 과 동기였는데 그의 첫인상이 별로였다. 그 역시 나에 대한 인상이 별로였다고 했다. 보통은 서로 좋은 인상과 호감을 가지고 연애를 시작하는데 우리의 시작은 전혀 달랐다. 그러나 우연한 계기로  그와 나의 공통분모가 적지 않음을 발견하고 지금에 까지 이르렀다. 연애 초기엔 돌아가신 그의 엄마와 나의 아빠께서 우리 둘을 이어주신게 아닐까 하고 진부하고 오글거리는 생각을 했었다. 


  2002년에 시작된 막연한 외국생활에 대한 동경이 결국은 미국에서의 직장생활로 연결되었다. 타국에서의 낯선 생활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이 곳에서 남자를 만나 생각지도 않은 연애를 시작했고 2년 후 결혼생활까지 시작되었다. 그리고 연구하러 나온 이 곳에서 하려던 공부는 (잠시) 접은 지 오래고 대신 육아 전선에 뛰어든 지 어느새 5년 차다. 사실 모든 것이 새로운 시작이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익숙해질 만하면 여전히 어렵고 낯선 곳이 미국이고 육아며 결혼생활이다. 나의 시작이 충동적이고 막연했을지 몰라도 그리고 그 끝이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을지라도 나는 내일 또 새로운 시작을 할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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