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꿈꾸는 사자의 도전
골칫거리 핵심 인물은 내보냈으나, 더 큰 문제가 생겼다.
고분고분할 줄 알았던 장 팀장이 최주연 대리의 퇴사 후 말을 안 듣는다.
괜한 일을 만들어 힘들게 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닌다.
김 실장 예상으론 한 달도 못되어 스스로 무너져 자신에게 길들여지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오래 버티며 오히려 직원들의 동요 현상까지 생길까 걱정이 된다.
김 실장은 이젠 자신의 뜻대로 따르지 않는 장 팀장도 바꿔야겠다고 생각한다.
“장 팀장, 요즘 일 많지?”
“네, 정신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괜찮은 인력이 있어서 추천하네, 여기 이력서 봐봐.”
“……”
“다음 주에 면접을 잡을 테니 참석하게.”
‘뭐지?’ 민호는 자리로 돌아오며 생각한다.
이력서를 자세히 보니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유학까지 다녀온 수재다.
‘이런 자리에 입사할 인물이 아닌데 면접이라니?’ 좀 의아스러우나 실력이나 이력은 서류상으론 충분하다.
민호는 면접 자리에 참석하여 보니, 인상도 서글서글하고 성격도 좋아 보이는 그녀다.
면접 중에 바로 출근가능 하냐고 묻는 김 실장, 민호는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기에 군소리 없이 지켜본다.
그녀는 앞으로 말해도 뒤로 말해도 똑같은 이름, 정미정 과장이다.
입사하자마자 열 일 하는 그녀, 일머리도 있어 알아서 척척이다.
그녀가 입사한 다음부터는 오히려 실장도 지시하는 일이 줄었다.
상관이 지시한 일이기에 군소리 없이 진행했던 불필요해 보이던 일들은 이제 지시하지 않는다.
그 덕에 훨씬 수월해진 민호다.
오래간만에 한숨 돌리며 팀원들을 살필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내심 그녀가 고맙기까지 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더욱 익숙해져서인지, 별 나무랄 데 없이 자연스럽다.
민호는 어느새 그녀에게 너무 의지하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실장도 별말 없고 요즘은 참 평화롭고 잘 돌아가는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미정 과장과의 미팅 중에 그녀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영문도 모르고 당황한 민호.
“무슨 일 있어요? 정 과장.”
“야, 너 때문이잖아!” 소리를 꽥 지르는 정미정 과장.
“……”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문이 막힌다.
“아-악!”
또 한 번 괴성을 지르는 정 과장.
“무슨 일이야?” 김 실장이 달려왔다.
눈물까지 훌쩍이고 있는 정 과장을 보니 민호는 어이가 없다.
“둘이 회의실로 들어와!” 김 실장이 소리치며 지시한다.
회의실로 들어서자마자, 민호를 나무라는 김 실장.
이유도 묻지 않고 정 과장을 달래며 장 팀장 잘못이라며 몰아세운다.
‘도대체 뭐지? 영문을 모르겠다. 뭐가 어찌 돌아가는 건지, 내가 무슨 잘못을?’
민호는 자신도 모르게 실수했는지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이런 지경에까지 벌어질만한 일은 없다.
그간 믿고 배려하며 잘 지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민호는 무조건 나무라는 김 실장이 되려 서운하고 서럽다.
갑자기 고개 숙인 책상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죄송합니다.”
어쨌거나, 믿음직한 여직원이 자신 때문에 울고불고했으니, 우선 죄송하다 하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혼란스럽다. 도저히 일이 잡히질 않는다.
그녀에게 묻기도 힘들고 이유 없이 죄인이 된 것 같다.
아니, 타인의 시선이 민호를 죄인으로 만들고 있다.
그 사건 이후, 회사 내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
“아침 회의 시간에 다리를 만지고 성추행을 했다네~.”
여직원들이 민호를 피하며 소곤거린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민호는 어색해진 그녀와 찻잔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정 과장,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그거 아니잖아요?”
“그날, 왜 그랬어요?”
“죄송해요, 팀장님. 그날 제가 좀 예민한 날이라 너무 우울했었나 봐요. 지금은 괜찮으니 지난 일은 잊어주시고 예전처럼 잘 지내요, 우리. 호호호”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민호를 쳐다보며 웃는다.
“……”
민호는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온다.
회사 내에 이상한 소문은 일파만파 퍼져나가고, 일일이 해명할 수도 없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퍼 담을 수 없는 노릇, ‘여직원의 잠깐의 착각으로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김 실장을 찾아가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지만, 무슨 핑계나 대는 비겁자로 몰아버리고 외면해 버린다.
사실은 김 실장과 정 과장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다.
그녀는 그림에 소질이 있어, 대학원까지 나오고 욕심에 유학까지 다녀온 유학파다.
바로 IT 글로벌기업에 입사하여 디자인 실력을 과시하며 잘난 맛에 다녔다.
그러나, 남자 직원들의 텃세와 차별은 그녀를 좌절시키기 일쑤였고, 살아남기 위해 그녀는 그곳에 맞게 익숙해지며 출세하고자 스스로 정치질을 하는 산전수전 다 겪은 욕심 많은 여우였다.
실력도 있고 출세욕이 있어 언젠가 쓸모 있을 거라 생각하고 김 실장은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녀에게 장 팀장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히겠으니 입사하라는 실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곳에 들어온 것이었다.
면접 때 처음 본 장민호 팀장은 그녀가 보기엔 순진한 애송이에 불과했다.
김 실장의 말대로 빨리 적응해서 몰아내고 그 자리에 자신이 앉으면 그만이었다.
김 실장의 시나리오대로 적응할 때까지 장 팀장의 말을 잘 듣다가, 적응됐다 싶어 “묘 날, 아침 회의 시간에 소리치고 울어라” 란 지시대로 연극을 했다.
그렇게 하면 뒷일은 알아서 하기로 한 김 실장은 그 일을 성추행으로 소문을 낸 것이다.
장 팀장에게 제대로 충격과 타격을 준 듯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 팀장의 힘 빠진 우울한 모습에 김 실장은 내심 흐뭇하다.
이 쇼가 제대로 먹힌 듯하다.
‘세상 혼자 바른 체하더니, 맛 좀 봐라 이 녀석.’
한 번 더 강펀치를 먹여야 아웃시킬 수 있단 생각에 장 팀장을 부른다.
‘장 팀장, 반성 좀 했어? 잘 좀 하지, 책임을 져야지?’
“……”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에 대한 배신감과 불신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민호를 점점 감쌌다.
민호는 맨 정신으로 잠들기 힘들어 술의 힘을 빌려 잠을 청해 보지만, 잠결에도 악몽에 시달리며 온몸이 철퇴를 두른 듯 천근만근 무겁고 출근하기가 쉽지 않다.
일을 좋아한다 생각했건만, 출근만 하려면 누구의 심장인지 갑자기 나대고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와이프와 어린 자식을 생각하며 숨을 크게 내뱉고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그러나, 회사에 들어서면 다짐과는 다르게 몸과 마음이 경직되어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
그 사건 이후, 그렇게 여러 날을 긴장된 상태로 출퇴근을 하던 민호가 어느 날 악몽이 아닌 이상한 꿈을 꾼다.
큰 바위산들로 둘러싸인 협곡의 깊은 계곡을 따라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하늘 방향을 향해 길게 뻗어 있다.
길이 시작되는 곳에 서있는 용맹해 보이는 사자가 이어지는 길 끝을 응시하자, 멀리 길 끝이 맞닿은 스카이라인에서 섬광처럼 밝게 빛을 뿜기 시작한다.
사자는 그 빛을 향해 사라질세라 재빠르게 달려간다.
그곳에 빛과 함께 아우라를 뿜는 무엇인가 있다.
빛이 사자를 인도하려는 듯, 사자가 내달리는 길마다 환하게 빛이 발한다.
사자는 어느새 민호가 되어 열심히 빛을 향해 달린다.
그러나, 앞으로 달려가면 갈수록 빛은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빛만 보며 앞으로 계속해서 달리는 민호.
잠에서 깨었지만, 사자와 빛의 모습이 선명하다.
“사자 꿈을 꾸다니! 그런데, 그 빛은 무얼까?”
이상하게 다른 날에 비해 몸과 마음이 가볍다.
‘회사에서 혹시, 좋은 일이 있으려나?’
옷장을 열어 와이프가 다려놓은 가지런히 걸려있는 흰 와이셔츠를 꺼내 입고 이른 아침 집 밖을 나선다.
그러나, 회사에 들어서는 순간, 스위치를 켜면 미리 걸어놓은 최면이 동작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힘에 눌려 다시 심장이 요동친다.
다시 부정적인 생각들이 뇌리 속으로 스멀스멀 들어온다.
민호는 아무것도 모른 체, 또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