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벌써 이주일이 흘렀다.
이제야 미안함을 뚫고 고마움이 올라오는 거 같다. 우선, 고맙다는 말로 여행을 시작한다.
"고마워"
※ 여행이야기지만, 나의 상황(파킨슨환자)에 느끼는 일반적이지 않은 개인적인 글임을 고지합니다.
일반인의 여행인지 환자의 여행인지 그 애매한 선에서 역할도 명확지 않은 그런 여행의 출발.
가장으로 이끌어야 하는지, 환자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모를 정의하지 못한 나 자신을 끌고 우리에게 다시없을 허용된 물리적 시간의 기회를 놓칠세라, 나도 모를 그 소용돌이 속으로 사랑하는 그들과 함께 뛰어들었다.
우린 그렇게 베트남 나트랑에 왔다.
섞인 무리에서 역할을 못 찾아 어정쩡한 기분이었지만, 해외가 아닌 국내여행을 온듯한 이런 편안한 안정감은 무엇인가?
이젠 나조차도 챙기기 힘든 신데렐라가 돼버려 와이프와 아들을 보살필 가장의 역할도 힘든데, 형댁의 존재는 내게 가장의 무게를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그렇기에 용기인지 염치인지모를 해외여행에 겁 없이 질렀더랬다. 처음엔 그것도 유럽여행을….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사방에서 무리의 신호가 겹치며 행선지는 휴양지인 나트랑으로 바뀌고, 누군가는 여행의 설렘이 김 빠져 버렸다.
다 함께, 사랑하기에, 배려하는 마음으로 계획했던 여행이…,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설렘이 날아가며 여행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가려버렸다.
알면서도 극복하겠지란 자만으로 김 빠진 후, 식힐 여유도 없이 그냥 떠나온 나트랑.
인간은 달라진 풍경과 날씨와 상황에 그냥 맡기는 단순한 동물이 아닌 게 문제였다. 정의하지 못한 오해의 잔재와 나의 변덕스러운 병마로…….
이번 여행도 형님댁과 함께라 늘상 그렇듯 의지해서 편했지만, 많은 문제를 알게 됐고 생각을 하게 했다.
집 앞 공항리무진버스 정거장.
춥고 매서운 바람이 부는 1월의 토요일 오후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정거장 앞에서 터질듯한 캐리어를 잡고 서 있는 아우네 식구들.
엎어지면 코 닿을 정류장에서 해외로 가는 리무진버스를 언제나 타볼까, 지나가는 버스를 볼 때마다 아쉬운 눈으로만 바라보다 이사하기 전에 드디어 인천공항행버스를 타게 됐다. 6년 만의 소망성취다.
따듯한 나라로 떠나는 여행이라 얇은 옷들 사이로 찬바람이 파고들지만 이 정도의 추위는 여행에 대한 기대로 가뿐하다.
해외여행이라곤 20년간 신혼여행과 세 식구 패키지 일본여행 이후 정말 오랜만의 여행이다. 비행기를 타는 자체로 설레는, 일찌감치 캐리어를 거실에 펼쳐놓고 빠진 게 있을까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채운 짐들, 그러다 보니 두 개의 짐꾸러미가 터질듯하다.
10분남짓 지나고 버스가 도착하고 짐칸에 캐리어를 싣고 나도 버스에 몸을 싣는다.
수능은 망쳐서 대입은 오리무중이고 병세도 안 좋아지고 수입도 없지만 어쨌거나 오늘이 오긴 왔다.
형님댁과 이날을 위해 몇 년을 함께 여행적금을 모았고 금액과 상황에 맞춰 결국 나트랑으로 정해졌다.
버스는 찬바람을 가르며 달리지만 예정도착시간보다 늦어졌다.
공항에서 겉옷을 받기 위해 스탠바이 중인 형댁…, 어디냐는 전화벨소리로 출발 전부터 조급함으로 심장이 요동친다.
우리의 여행은 시간과 돈을 아끼며 좋은 서비스를 받기 위해 사소한 것들까지 연결되어 있다. 호텔숙박부터 관광지와 택시예약까지…, 늦어지면 틀어지고 조각난다. 패키지가 아닌 자유여행이라지만 그에 못지않다.
형네는 여행계획을 짜느라 골머리 좀 아팠을게다. 더구나 번복된 두 번의 여행계획으로 출발 전부터 피로와 스트레스로 설렘 같은 건 없었을…, 게다가 다녀온 뻔한 베트남이기에….
버스에서 내려 짐을 꺼내기도 전에 두꺼운 잠바를 서둘러 벗어 말을 듣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 차가 세워진 도로가로 내달린다. 바통을 터치하듯 극적으로 옷을 건네고 받아 든 형님도 힘차게 내달린다.
그렇게 우리에 여행은 숨 쉴 새 없이 삐걱대며 시작됐다.
비행기 안.
여섯 시간을 저가항공을 타고 이동하기란 쉽지 않았다. 좁은 좌석은 불편했고 긴 시간 어두운 비행기안과 좌석의 뒤태만 보이는 시야는 답답했다.
돈 없이 가는 여행에 이 정도 불편은 감수해야 하거늘, 이런 때엔 어김없이 내 안에 환자가 불쑥 튀어나와 불만을 이야기한다. 여행 내내 그 녀석은 불편을 토로할 게다. 나는 또 남들 배려하느라 참았다 스스로 생각할 테고…, 지금 내 인성으론 함께 여행을 오면 안 되는 거였다.
민폐다….
긴 시간 어두운 하늘을 날아서 깜란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인천국제공항과 비교되서인지 시골공항처럼 한산하고 허름하게 느껴지고 공산국가라 그런가, 통관검사원은 군복을 입고 있고 공항분위기가 약간의 통제된 느낌이 난다.
비행기에서 내려 짐을 찾고 대기 중인 승합차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밤에 도착하여 주변이 어두컴컴하자만 운전은 기막히게 거칠다. 중앙선을 침범하며….
관광지가 아닌 어두운 시골길을 승합차에 실려 끌려가고 있다.
그래도 다행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으니, 노아의 방주라 생각하고 맘 편히 차 안 가족의 따듯한 공간에 나를 맡긴다. 함께 죽든가 함께 살던가. 미련은 없으리라.
한참을 내달려 도착한 하바나호텔이 천장에서부터 붉은 장미로 우리를 반긴다.
'여행 온 게 맞구나!' 이제야 실감한다.
늦어진 시간 탓인지 형네와 아우네는 다른 층으로 배정되고 우리는 16층의 구석진 곳을 찾아 들어간다.
"와우 바다뷰다."
그러나, 바다를 향해 뚫려 있는 액자 같은 창문엔 시커먼 밤바다만 보일 뿐이다.
나트랑의 해변은 어떤 모습일지 내일 아침이 기대된다.
긴 시간 비행기와 차로 이동하며 어두운 밤을 통과하여 도착한, 아직은 시차도 못 느끼는 낯선 곳에서 여행온건지도 모른 기분으로 내일을 기대하며 피곤한 몸을 말끔한 하얀 시트를 두른 침대에 눕힌다.
눈을 뜨니, 창으로 빛이 들어온다.
바다를 그려놓은 듯한 액자 같은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본다.
어젯밤과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여행지에서의 처음 여유롭게 바라보는 시원한 첫 바다다.
'아, 바다 건너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왔구나! 이곳 나트랑에….' 이제사, 실감이 난다.
한국은 영하 10도라는데 이곳은 딱 적당해서 체온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
라디오를 켜니 9시에 흘러나오는 DJ목소리가 이른 아침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아, 이것도 위시리스트에 있던 상황이다.
'추운 겨울 따듯한 나라에 가서 라디오를 들으며 사연 보내기'
"하하하. 여행을 왔군. 다 함께"
돌이켜 보니 함께 여행 온 그것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이었다.
호텔에서의 베트남음식이 간간이 섞여있는 조식뷔페를 먹고 첫 관광목적지 양떼목장과 기대마지 않는 선셋사막을 가기 위해 그래도 단체인지라 로비에 모였다. 오늘은 미리예약해 둔 차량으로 다 함께 이동한다.
식사 때도 그랬지만 무의식적으로 최소한의 그룹처럼 형네가 앞쪽 자리에 앉고 아우네는 뒷쪽에 자리 잡는다.
날씨는 온화하고 적당하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야자수는 우리가 한국이 아닌 나트랑에 왔음을 계속 확인시켜 준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