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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D 문화 브로셔 Jul 13. 2021

드라마 마인 리뷰

나의 가치를 찾기 위한 고통의 긍정

이 글은 온갖 스포일러로 가득한 글이니 그 고통을 긍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입장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글을 시작해보자. 마인은 의미는 mine 즉 나의 것이다. 드라마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에 대한 눈길과 관심을 계속 가지고 가고 있다. 마인 드라마는 제작의도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해 명예롭게 전진한다. 나의 것이라 믿었던 것들에서 용감하게 벗어나 진짜 나를 찾아나가는 강인한 여성들의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아마도 그 여성들은 두 주인공인 서희수와 정서현을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진짜 서희수와 정서현은 자신의 것을 벗어나 진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것일까?

마인의 바탕이 되는 사상적 배경

"나의 것이라 생각했던 것을 버리고 진짜 나를 찾는다"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하니 도대체 가짜 나는 무엇이었나를 먼저 살펴보자. 원래 어떠한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려면 그것이 아닌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야 하는 법이다. 진짜가 무엇인지 알려면 진짜를 열심히 살펴볼 것이 아니라 가짜를 살펴봐야 진짜의 중요한 본질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들이 가졌던 가짜 나는 결국 외부에서 주어지는 페르소나이고, 외부의 요청과 시선에 얽매여서 만들어간 자신의 모습이다. 그러한 것은 진짜 내가 아니니 벗어버리겠다는 것인데, 그러한 것들을 모두 벗어버리게 되면 진짜 내가 남게 될까? 여기서 구조주의 사상의 근본적인 질문이 던져진다. 구조주의는 진짜 나란 없으며 그저 구조 안에 위치 지어질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외부에서 주어지는 역할과 위치가 없어지면 모든 껍데기가 벗겨진 배추처럼 남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이 드라마는 구조주의 사상이 아닌 그 반대편에 있는 실존주의로 나가게 만든다. 기본적으로 이 드라마가 바탕에 깔고 있는 주제 의식의 사상은 개별자의 주체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실존주의적 사상이라 볼 수 있다. "진짜 나를 찾아나가는 강인한 사람들의 명예로운 전진" 이 말은 니체의 위버멘쉬를 떠오르게 한다.


공감의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는 공정과 공평

이 드라마의 주요 메시지인 자기 찾기가 과연 지금 이 시대에 잘 맞아떨어진다고 할 수 있을까? 시대가 요구하는 바로 그 메시지를 담아낸 창작물은 큰 성공을 거두는 것이고, 시대에 동떨어진 메시지를 말하는 작품은 대중이 외면하기 마련이다.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공정과 공평이다. 공감이 시대적 대세인양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이 시대 즉 공감의 시대에 억눌려 있는 목소리는 바로 공정과 공평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헛발질이란 바로 주제를 잘못 가지고 간다는 것이다. 왜 지금의 이 시대에서 실존주의적 독자성이라는 주제를 끌고 들어왔는가? 물론 이 주제가 중요한 주제이고, 여전히 사람들에게 유효하게 작용할 수 있는 주제임은 맞다. 하지만 언제나 통하는 주제는 바로 지금 딱 이 자리에서는 그저 그런 효과만 발휘할 뿐 강력한 한 방은 되지 못한다.

공감이든 공정이든 모두 좋은 얘기 아니냐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보여주는 좋은 면을 보면서 그 뒷 면에 있는 곰팡이 피는 나쁜 면은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공감은 좋게 느껴지지만 반드시 그 뒷 면에는 스멀스멀 배제와 차별성을 키워낸다. 누군가를 공감해준다는 것은 그 반대에 있는 사람은 배제하고 미워해준다는 얘기다. 공감을 받는 사람은 가까이에 있다는 이유로 불합리하게 인정을 받아낼 수 있다는 얘기다. 공감을 받은 그 누군가에 의해서 피해를 받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이 바로 공정함과 공평함이다. 정서현이 최종 보스가 되는 그 결말을 그대로 끌고 가더라도 한회장이 따뜻한 공감의 마음으로 정한 한지용에 대한 불공정함을 지적하고, 공평함을 찾아주는 시원한 방법으로 정서현이 보스 자리에 올랐다면 주제는 충분히 변환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이 시대에 맞는 메시지로 극을 풀어나가는 감각이다.


내면이 빈 실존들의 공허한 외면 꾸미기

이 드라마는 외향적으로는 매우 화려하고 귀족적이며 젊잖은 모습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공허하고 상스럽고 악에 가득한 인물들이 똬리를 틀고 숨겨져 있다. 등장인물들은 외부 세계가 요구하는 고귀한 재벌들의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지만 내면은 빈곤으로 가득하다. 그들 내부의 악을 숨기기 위해서 더 철저하게 자신의 외부를 예의와 체면으로 채워야 한다. 마음속에 더 큰 악을 가지고 있을수록 겉으로 더 두꺼운 포장을 필요로 한다. 포장이 더 철저한 사람에게서는 더 큰 악의 향기가 퍼져 나온다. 타자에게 예의와 도덕이 과도한 게 자들에게서는 그들이 스스로 억누르고 있는 악의 팽팽한 긴장을 보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초자아가 느끼고 있는 자신에 대한 콤플렉스와 자기 비하를 극복하기 위해서 남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모습에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부어야 한다. 그들은 그렇게 점점 속이 비어 가고 껍데기만 점점 두꺼워지며 단단해져 가는 자신을 만들어 가게 된다. 그들의 예민성이란 겉만 포장하느라 깡그리 비워진 자신의 내면의 결핍으로 인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아주 작은 피해에도 몸부림치며 견디지 못해 한다. 그들은 복수의 신을 섬기며 찬양할 수밖에 없는데 그들 자신이 그렇게 자신에게 가해지는 작은 돌들을 되쳐낼 수 있는 강한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자신을 만들지 못하기에 사랑하고 용서하는 자신의 겉모습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 겉모습마저 붕괴될 때 그들은 악의 괴물이 되고 만다. 겉모습만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자신의 안과 겉모습을 구분할 수조차 없어진다. 겉모습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죽어가는 것이다.     


로봇들로 배치된 빈곤한 캐릭터

드라마의 캐릭터 구축은 전반적으로 참으로 빈곤하다. 인간들의 복잡한 내면들과 마주쳐본 경험에서 나오는 세련된 캐릭터의 창조가 없다. 드라마의 캐릭터들은 단조롭고 인위적으로 구성된 로봇 같은 느낌을 준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역할 로봇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우리로 하여금 등장인물들을 인간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미세하게 나타나는 인간의 묘한 모습들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내면이란 종이에 쓰여진 글자들처럼 명료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 미묘한 인간적인 부조리함과 모순 그리고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펼쳐지는 비논리적 모습과 변화성에서 로봇이 아니라 인간임을 무의식적으로 깨닫는다. 그렇지만 극에서 그것을 제대로 펼쳐내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극에서는 최소한의 논리적 정합성과 합리적 전개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큰 틀에서는 매우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러한 부분에 말도 안 되게 이야기가 깨져버리면 매우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통상 막장 드라마니 앞뒤가 안 맞는다느니 하는 것들은 바로 그러한 최소한의 이성적 장치가 마련되지 못한 드라마를 볼 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성을 지켜나가면서 그 안에 인간의 미묘한 부조리와 변화를 집어넣는 일에서 드라마의 완성도와 수준이 생겨나는 것이다. 불행히도 이 드라마는 그렇게 드라마의 완성도와 수준을 높이는데 실패했다.

결국 누가 자신을 찾는 미션을 완료했는가

이제 드라마를 보면서 불편했던 점들을 지적하는 것은 했으니 다시 원래 이 드라마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 이 드라마에서 엠마 수녀의 역할은 드라마의 주제를 설명해주는 설교자다. 진짜 자신의 것이 무엇이냐는 얘기에서 엠마 수녀의 말은 “살면서 내가 한 말 내가 한 행동 또 불편하지만 내가 늘 지켜온 내 삶의 가치 이런 것들은 우리가 세상 떠날 때 가지고 간데요”라고 하며 자신의 삶의 가치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서희수와의 대화에서 엠마 수녀는 “어쨌든 내 마음 내가 내린 결정들로 인생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중요하게 설파한다. 엠마 수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는 희수에게 다 가진 것 같았지만 가지지 않았던 것처럼 잃지도 않았다고 한다. 소유냐 존재냐의 문제에서 결국 소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가치대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중요한 것이라 설파하고 있다.

드라마가 자신을 찾아가는 두 주인공으로 설정한 서희수와 정서현이 결국 자신을 찾았다고 볼 수 있겠는가에 대해 그렇다라고 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먼저 정서현이 찾은 자신이라는 것은 성소수자뿐이다. 그것을 숨겨왔고 거부해왔으나 다시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자신을 찾았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약한 설정이다. 정서현은 본질적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재벌 회장 자리에 대한 의무감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서희수는 원래 자신의 정체성이었던 배우를 포기하고, 재벌의 며느리로서 들어갔다가 다시 자신의 정체성인 배우의 모습을 찾았다고 나온다. 서희수는 자신을 지키는 것은 자신 뿐이라는 자신의 말을 되새기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마인 드라마의 마지막 대사는 “수녀님 답을 찾은 것 같아요. 모든 것을 잃은 나 자신도 사랑할 수 있는 나 자신 마인”이라고 하는 서희수의 대사이다. 그런데 정말 서희수는 자신을 찾은 것일까? 서희수가 돌아간 배우라는 자리는 진정 자신의 가치를 찾아 떠난 길의 종착역이 맞는 것일까? 정서현과 서희수 모두 우연한 사건들로 인해 자신의 소유를 잃을 위기에 처하거나 소유라고 생각했던 것을 일부 잃은 것일 뿐 자신의 가치를 찾기 위해 내던져 버린 것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해있는 그 자리의 영욕에 대한 집착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대는 어린아이가 될 수 있겠는가

이제 이 드라마 주제의 철학적 배경이었던 니체의 사상을 살펴보자. 니체는 사회가 규정하는 대로의 가치 체계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낙타에 비유한다. 낙타는 그렇게 세상의 가치와 규범을 등에 무겁게 지고 힘들게 사막을 걸어간다. 다음 단계로 세상의 가치 체계를 거부하는 사자의 단계를 말하고 최종적으로는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내는 어린아이의 단계를 말한다. 어린아이의 단계란 스스로 가치 체계를 창조해내고 그러한 자신의 가치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단계이다. 어린아이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기존의 가치를 벗어던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가 있어야 한다. 니체는 또한 긍정을 이야기한다. 니체의 긍정은 그저 세상의 모든 것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낙관적인 모습이 아니다. 니체의 긍정이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니체 긍정의 핵심은 고통의 긍정이라는 것이라고 테제를 세울 필요가 있다. 아니면 세상에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전혀 니체적인지 않은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펼쳐나가는 데 있어서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난관과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서 그러한 고통 또한 나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긍정이다. 니체의 긍정은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맞서서 극복하겠다는 의지의 다른 말이다.

이 드라마 등장인물 중에 진정 자신에게 주어진 가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그렇게 함으로 인해 올 수 있는 고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한수혁뿐이다.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어린아이처럼 가볍고 자유롭다. 어린아이에게는 재벌 회장이 아무 의미가 없다. 어린아이는 재벌 회장을 거부하고 장난감으로 자신의 성을 창조하는데 몰두할 것이다. 이 드라마의 주제에 맞는 진정한 주인공은 한수혁이다. 그렇지만 드라마는 한수혁을 단지 한지용이 회장 자리에 다가갈 수 있는 수단으로만 이용하고 있다.

자 이제 물어보자. 글을 읽는 당신은 어린아이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럴 만큼 고통을 긍정할 용기가 있겠는가?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고 이루기 위해 욕망 덩어리인 돈의 우상을 걷어찰 튼튼한 다리가 준비되어 있는가? 온몸을 휘감은 규범과 체면 그리고 욕심을 벗어던짐으로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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