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마음속 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경혜 Oct 21. 2020

가면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나는 여러 개의 가면을 가지고 있다.

한 남자의 아내라는 가면, 며느리라는 가면, 딸이라는 가면, 직업에 따라오는 가면 등등 상대가 누구이냐에 따라  마치 아이언맨 슈퍼맨 배트맨 등 각종 맨들 우먼들이 슈트를 입는 것처럼 다른 인격을 뒤집어쓴다. 가면을 쓰면 그냥 나로 있는 것보다 누군가를 대하기가 수월해진다. 그리고 그 가면은 쟤는 어떤 사람일까 상대방의 의심의 눈초리로부터 지켜준다. 가면은 그것대로 별 문제는 없는 듯하다.

그러나 진짜 문제가 되는 순간은 그 가면이 슬쩍슬쩍 벗겨질 때다. 물론 정상적인 범주의 사람들은 가면이 얼굴과 딱 붙어 잘 벗겨지지 않겠지만 어떤 불안정한 사람들은 가면이 딱 붙어있지 않고 얼굴에서 조금 흘러내리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 벗겨져버리기도 한다. 정확히 안착해 있다고 믿고 있다 벗겨져버리는 순간에는 감당할 수 없는 민낯을 드러냈다는 생각에 패닉 상태가 되어버린다.


나는 어느 날 처절하게 가면이 벗겨졌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 일은 그 일이 있고 난 전과 후의 나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그전의 나는 조금은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것이 남들에게 겨우 매력적으로 보일만큼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후의 나는 어딘가 불안했고 우울했으며 항상 긴장한 것 같은 말없는 조용한 사람이 되었다. 

마음은 괜찮다가도 갑자기 낯선 누군가가 다가오면 가면이 벗겨졌던 순간이 떠오르며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는다.


나는 우연히 발견한 법구경 속 구절을 절감했다. 분명 나에게서 생긴 것인데 점점 나를 잠식해갔고 그 모습의 감옥에서 영영 나오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살얼음 판을 걷듯 움츠리며 걷다 누군가 다가오기라도 하면 달팽이처럼 쏙 숨어드는 나날이었다. 그러나 나를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 항상 일관된 태도를 갖는 것이 힘들었다. 어떤 날은 마음이 편안해서 사람들하고 명랑하게 얘기를 나누다가 다음날은 전날 만든 내 모습이라는 가면이 벗겨질까 두려워서 움츠렸다. 움츠린 모습에 당황한 사람들의 얼굴이 나를 더 움츠리게 만들었고 질식할 것 같은 긴장 속에 부서질 것 같았다.

일관되지 못한 태도가 사람들을 더 주목하게 만드는 것 같아 마음이 괜찮은 날에도 되도록 말을 하지 않았다. 쟤는 원래 조용한 애라는 이미지가 박혔고 사람들은 더 이상 내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 사실에 감사했지만 여전히 괴로웠다.

나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할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마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마음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 같아 막연히 명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변에 별로 친하지는 않지만 명상을 한다는 언니에게 용기를 내 어떻게 하면 명상을 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평소에 말도 없던 애가 다짜고짜 명상을 하고 싶다며 간절하게 묻는 내 모습에 당황하는 듯 보였다. 언니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고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과 하는 거라며 나에게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해했다. 크게 낙심한 나를 며칠을 두고 지켜본 언니가 일주일 템플스테이를 권했다. 선생님을 필두로 20명 남짓한 청년들이 모여하는 명상 프로그램을 기획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과 낯선 곳에서  일주일을 어울려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벼랑 끝 심정으로 신청했다.


그것이 명상과의 인연의 시작이다.

그 후로 나는 프로그램이 있을 때마다 참여했다. 마음에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지만 점진적으로 나아졌다.

지금도 여전히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불쑥불쑥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고 마음에 휩쓸려 긴장하지만 예전처럼 오래가지 않는다. 마음이 일어난 순간 감정에 일순 동요되다가도 내 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경직되고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느끼고 들여다본다.


몸이 떨리는구나. 두렵고 불안하구나.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나에게 말한다는 느낌보다 제삼자에게 말하는 것처럼 마음에게 말해주면 마음은 서서히 가라앉는다.

가면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가끔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일 때는 손쉽지만 헐거운 가면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한다.

가급적이면 가면 속 나를 드러내고 그냥 마음을 알아차린다. 마음이 흘러가는 것을 느끼고 들여다본다. 그렇구나.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운동을 꾸준히 하면 몸에 근육이 생기듯이 명상을 꾸준히 하면 마음에 근육이 생긴다고 한다. 나는 여전히 흔들리지만 꾸준한 명상을 통해 마음의 근육이 단단하게 생기길 바란다.

그래서 더는 흔들리지 않고 아니, 흔들림을 받아들이며 있는 그대로 충분한 사람이 되길.

바람에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인 나무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기약 없이 버둥대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