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은 답을 먼저 쓰고,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할 말이 많거든요.
- 저렴한, 어쩌다 한번 가끔 마실 용도의 잔
: ‘레드 와인잔’ 혹은 ‘화이트 와인잔’.
- 돈을 좀 쓰고, 진한 레드 와인을 자주 마실 때 쓸 잔
: ‘보르도 레드 와인잔’ or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잔’
- 돈을 좀 쓰고, 향에 집중해서 와인을 자주 마실 때 쓸 잔
: ‘부르고뉴 레드 와인잔’ or ‘피노 누아 와인잔’
- 돈을 좀 쓰고, 화이트 와인을 자주 마실 때 쓸 잔
: ‘샤도네이 잔’
- 돈을 좀 쓰고, 스파클링 와인을 자주 마실 때 쓸 잔
: ‘샴페인 잔’
- 돈을 크게 쓰고, 나를 위한 선물을 주고 싶을 때
: 카다록을 찾아보고 예쁜 것을 고른다.
와인 관련한 질문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와인잔 종류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좀 난감합니다. 와인잔 종류를 설명한다는 것은, 곧 와인의 종류를 설명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 질문을 하시는 분이라면, 와인에 대해 잘 모르는 분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가능한 너무 깊지 않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일단, 와인잔을 만드는 메이커. 와인잔은 전 세계의 다양한 회사에서 만들어지고 있는데, 한국에서 유명한 메이커라면 (인지도를 고려했을 때) ‘Riedel(리델)-오스트리아’, ‘Spiegelau(슈피겔라우)-독일’, ‘Schott Zwiesel(쇼트 즈위젤)-독일’ 정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Zalto(잘토)’가 주목받고 있는데, 부티크 브랜드라고 볼 수 있으니 참고만 하시는 걸로. 이 회사들은 각자 다양한 종류의 와인잔을 생산 중인데, 다양한 고객층의 요구에 맞출 수 있도록 여러가지 라인업의 제품을 만들어 내고 있어요. 평상시에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싸고 튼튼한 잔도 팔고 있고, 와인 애호가가 사용하는 비싸고 연약한 잔도 팔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고급 와인잔 라인업일수록 종류가 세분화되어서, 초심자용 라인업은 4-5개의 제품으로 구성되고 있고, 와인 애호가용 라인업은 10가지 이상의 제품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와인잔을 사면 되냐는 질문에 대해서
“리델 와인잔을 사면 돼.”
라고 대답하는 건 적절한 대답이 아닌것이죠. 브랜드 마다 다양한 라인업이 있으니까요.(실제로 가게에서 손님들간의 대화 중에 가끔 듣게 되는 말입니다.)
그럼, 메이커에 대한 건 이 정도로 하고, 지금부터는 와인잔을 분류해 보겠습니다.
와인잔을 크게 나눠 보자면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레드 와인잔, 화이트 와인잔, 스파클링(샴페인) 와인잔. 그리고 실제로 와인잔을 만드는 메이커들도, 사용하기 편한 초심자용 와인잔 라인업의 경우에는 이 분류 기준 그대로 이름을 붙이기도 했구요. 예를 들자면 ‘Spiegelau’의 ‘Winelovers’ 라인업이 있습니다. 언제나 편하게 와인을 즐긴다는 의미로 이런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Riedel’의 ‘Ouverture’ 라인업도 이 기준을 따르고 있군요. ‘서곡(overture)’이라는 이름을 붙인 센스가 돋보입니다. “앞으로 당신은 더 비싼 와인잔을 사게 될 것입니다.”라는 의미일까요?
다음단계로 넘어가보겠습니다. 레드 와인잔의 경우, 크게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보르도(프랑스어 : Bordeaux) 와인잔과, 부르고뉴(프랑스어 : Bourgogne) 와인잔. (부르고뉴는 버건디(영어 : Burgundy)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보르도와 부르고뉴는 프랑스의 유명한 와인 생산 지역의 이름인데, 서로 상반된 스타일의 와인이 만들어지고 있어요. 보르도 와인은 진하고 파워풀한 맛이 주된 캐릭터인 반면, 부르고뉴 와인은 섬세하고 풍부한 향이 주된 캐릭터인 것이죠.
아마도 와인을 잘 모르시는 분이라면, “두 가지 와인이 다르다곤 하지만, 내가 먹어보면 무슨 차이인지 잘 모르겠지?”라고 생각하실거예요. 하지만, 이 두 가지 타입의 와인은 태어나서 한번도 와인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조차, 비교해서 먹어보면 그 차이를 즉시 느낄 수 있을만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적절한 예일지 모르겠지만, 보리차와 녹차의 차이 정도의 간격이랄까요?
언젠가 십여년 쯤 전에 지하철 광고 판에서, “우리 남편은 보르도 와인과 부르고뉴 와인을 구분할 수 있는 남자입니다.”라는 광고 카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카피라이터가 의도한 바는 ‘우리 남편은 아주 까칠하고 섬세한 남자입니다.’ 였을거에요.(무슨 제품이었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전기밥솥 류의 가전제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와인을 아는 사람에게는, "남편이 와인을 좋아한다는 뜻인가? 그걸 구분 못하면 혀에 문제가 있는거지. 카피라이터가 무슨 의도로 이렇게 썼는지는 알겠지만, 이 카피라이터는 와인을 잘 모르는구만." 이라는 생각이 드는 광고였을 뿐이었죠.
어쨌든, 이런 특징이 와인잔의 모양에도 반영이 되어서, 부르고뉴 와인잔은 보르도 와인잔에 비해, 향을 좀더 잘 모으기 위해 몸통이 크고(와인이 공기와 더 많이 만나도록), 입구가 좁아지는 형태로 만들어집니다. ‘Spiegelau’의 ‘Beverly Hills’ 라인업이 이런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르도 잔과 부르고뉴 잔을 부를 때,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보르도 잔은 ‘까베르네 소비뇽 잔’, 부르고뉴 잔은 ‘피노 누아 잔’이라고요. 그냥 줄여서 ‘까쇼 잔’ 이나 ‘피노 잔’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유인 즉슨, 보르도에서 주로 키우는 포도 품종이 ‘카베르네 소비뇽’이고, 부르고뉴에서는 ‘피노 누아’이기 때문이에요. 포도 품종에 따른 명명법이라고 할 수 있죠. 화이트 와인잔도 대부분 이런 방식의 분류법을 따르는데, 화이트 와인잔을 한가지만 장만한다면, 다양한 품종에 대한 범용성을 고려했을 때 ‘샤도네이 와인잔’을 추천합니다. ‘Riedel’의 ‘Vinum’ 라인업이 이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자, 그리고 다음으로 또 다른 분류를 해야하지만, 일단은 여기까지! 더 이상은 굳이 알 필요 없습니다. 이 이상의 분류법은 포도의 품종과 생산지역, 와인의 등급 체계 등등에 연관된 분류이기 때문에 설명할 것도 너무 많고, 내용도 너무 복잡해져요. 아주 나중에, 와인에 관심이 많아져서 와인의 지식이 깊어지신다면, 이름만 보고도 무슨 의미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실 겁니다.
그래도, 각각의 와인잔 이름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덧붙이자면, 아래의 표로 만든 이미지 파일과 같습니다.(내용이 꽤 많습니다.) 순전히 제 마음대로 분류한 것이라서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많이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순간부터, 어차피 정답 같은건 없으니까요.
와인잔의 이름은 ‘Riedel’(리델)의 ‘SOMMELIERS’와 ‘VINUM’ 라인업을 참고로 했습니다. 리델 카다로그도 링크를 걸어둘 테니, 궁금하신 분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Riedel Glass 카다로그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