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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네 와인바 사장 Nov 03. 2019

와인이 풀린다?

"와인이 풀린다 라는게 무슨 의미인가요?"


‘와인이 풀린다’라는 것은, ‘와인 병을 오픈하고 난 뒤, 시간이 흐르면서, 마시기 좋은 맛있는 상태로, 와인이 변해간다.’라는 것을 뜻합니다. ‘열린다’, ‘말랑말랑해진다’, 혹은 ‘와인이 깨어난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고보니 '깨어난다’는 표현이 너무나 시적이라며 좋아하던 분이 계셨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시나요?).


와인은 병을 여는 순간부터 계속해서 맛이 변해갑니다. 사실, 세상 모든 술은 병을 여는 순간부터 맛이 변해갑니다. 와인에 한정된 것은 아니에요. 심지어 위스키도 병을 따자마자의 맛과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의 맛이 다르거든요. 단지 다른 종류의 술들에 비해서 와인의 맛의 변화가 좀 더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와인이 풀린다’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될 뿐입니다. 실제로 저는 지인들과 위스키를 마실 때도 "이 위스키 조금만 풀어서 마셔야겠는데?"라는 말을 쓰기도 하니까요.

하여간, 손님들이 와인 마실 때 쓰는 표현들을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와인은 아직 덜 풀렸네.”

“이거 열리는데 얼마나 걸려요?”

“이거 깨어나려면 한참 걸리겠는데?”

“와 이건 정말 안 풀린다. 왜 이렇게 단단하지?”

“이제 조금 말랑말랑해진거 같다. 아까는 너무 땅땅했어. 향이 아까보단 많이 올라오네.”

“이건 너무 풀려서 꺽인 것 같은데?”

“난 와인 풀어서 먹는 것보다, 병 따자마자 먹었을 때가 더 좋더라.“


‘풀린다’라는 의미가 대충 감이 오시나요? 시간이 갈수록 맛과 향이 변해간다는 점. 전 이 점이 와인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와인이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이런 저런 와인을 먹다보면 와인이 풀리는 속도가 정말 제각각입니다. 와인병을 따자마자 먹었을 때 가장 맛있는 녀석도 있고, 어떤 녀석은 한 시간 뒤에, 어떤 녀석은 반나절 뒤에, 어떤 녀석은 다음날 맛있기도 해요. 가끔 손님이 남기고 간 와인을 다음날 출근해서 맛 볼 때가 있는데, 이게 내가 알던 그 와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맛있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시간이 지나면 더 맛있어지느냐? 절대 아닙니다. 너무 과하게 시간이 흐르면 향과 맛이 죽어버리게 되는데, 이럴 때 보통 ‘와인이 꺽였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일반적으로는 고급와인이거나 와인이 어릴수록(영young할수록. 만들어진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의미), 풀리는데 오래 걸리고 꺽이는데 오래 걸립니다. 반대로 저급와인이거나 오래 묵은 와인의 경우에는 금방 풀리고 금방 꺽이죠.


만화 ‘신의 물방울’에 보면, 주인공이 아직은 덜 익은(숙성이 덜 된) 와인을 마구 흔들어서 향과 맛이 살아나게 만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만화이다보니 매우 과장된 감이 없지는 않지만,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저도 가게에서 가끔씩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원래는 몇시간 뒤에 나야만 하는 맛과 향을, 와인을 과격하게 흔들어서 와인과 산소를 마구 뒤섞어서 시간을 강제로 당기는 효과를 내는 것이죠. 그렇다고 만화 주인공처럼 명주실을 뽑아달라고 하지는 말아주세요. 만화처럼 가늘고 길게 일직선으로 뽑는건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전국의 소믈리에들이 싫어합니다.


저는 가게에 놓을 와인을 고르기 위해 테이스팅을 할 때, 시간이 흐르면서 와인이 변해가는 모습을 체크합니다. 보통 한병을 마시는데 2시간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제 기억력을 믿지 않기 때문에 테이스팅 노트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병을 오픈한 시간을 적고 맛 본 시간 별로 감상을 적어놓는 것이죠. 그런 식으로 테이스팅을 하다 보면, 맛의 변화가 극심해서 첫 잔과 마지막 잔이 완전히 다른 술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시간이 갈수록 맛있어지기는 커녕 반대로 첫 잔이 제일 맛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와인들 중에서, 전 첫 잔보다 마지막잔이 더 맛있는 술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습니다. 작은 가게라서 소규모의 손님들이 한병을 천천히 마시는 분위기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단체 손님들이 많이 오는 가게 였다면, 첫 잔이 맛있는 와인을 많이 취급했을 겁니다. 한병이 순식간에 사라질 테니까요.


시간이 갈수록 맛이 변해간다는 점은 재밌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술을 소개하고 팔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좀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손님에게 이 와인이 어떤 맛을 내는지 간단히 설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따자마자는 좀 심심하고 은은한 향과 약간 산도가 강한 맛을 보여주지만, 조금나 지나면 부드러워지면서 마시기 편해지고 한시간 쯤 지나서 풀리고 나면 탄닌감이 확 살아나서 파워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짙은 맛을... 어쩌구 저쩌구...”

손님이 적은 날은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도 되지만, 혹시라도 손님이 많은 날이라면 저렇게 설명할 시간도 없고 기운도 없기 마련입니다. 그럴때면, 간단히 소개는 하고 싶은데 머리는 안 돌아가고, 그러면 본의 아니게 버벅거리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슬프게도 장사 경험이 오래되어도 이건 영 익숙해지지 않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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