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잔을 돌리는 행동을 ‘스월링(Swirling)’이라고 부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인을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하는 행동이죠. 그런데, 어떤 손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와인에 트라우마가 있어요. 일단 와인잔에 와인을 받으면, 열심히 돌려야 마음이 편해요. 안그러면 와인 처음 가르쳐준 선배한테 엄청 혼났었거든요."
아, 쫌, 제발. 잔 안돌렸다고 혼냈다는 그 선배, 이제는 제발 그런 꼰대짓 안하고 있기를 빕니다. 제가 손님들께 항상 말하는 것이지만, 술은 각자의 방식대로 편하게 즐기면 됩니다. 가뜩이나 스트레스 많은 세상인데, 술 마시면서까지 스트레스 받아야겠어요?
하여간, 짜증을 가라 앉히고, 본론으로 돌아가죠. 그렇다면, 그 손님이 혼나야만 했던 ‘스월링’은 대체 왜 하는 걸까요?
먼저, 와인이 더 빠르게 풀리게 됩니다. 아니, 더 빠르게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이렇게 애매하게 설명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와인이 풀리는 속도와 스월링 사이의 상관관계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확실히 검증되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주제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제 주관적인 경험이나 느낌의 관점이며, 상당수 와인 애호가들이 가지고 있는 의견일 뿐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받아들이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여간, 말이 좀 길어졌는데, 제가 느끼기엔 스월링을 했을 때 더 빠르게 와인이 풀리더라구요. 와인분자가 마구 움직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냥 기분일까요? 하여간, 그래서 이미 충분히 잘 익어서 섬세하고 여린 와인의 경우에는 일부러 스월링 하지 않기도 합니다. 괜히 스월링 했다가 꺽여버리면 곤란하니까요.
두번째로, 향을 더 많이 뿜어 냅니다. 와인이 공기와 닿는 면적을 넓히고,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바닥에 가라 앉은 다양한 향의 입자들을 뒤섞어서 공기 중으로 흩날리게 만드는 것이죠. 얌전히 담겨 있는 와인보다는, 잔 벽면에 와인이 잔뜩 묻어있는 상태가 공기중으로 더 많은 입자를 뿜어 낼 것이라는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손이 안 심심하고, 그냥 재밌고, 좀 있어보입니다. 네. 와인을 맛있게 마시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이유입니다. 싱겁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게 슬슬 잔을 돌리고 있으면 나름 재밌어요. 돌아가는 와인의 모양도 예쁘고, 와인 색도 뭔가 더 잘 보이는 기분이고, 괜히 막 있어보이고 그렇습니다.
와인드실 때 슬슬 잔을 돌려보세요. 급하게 돌리지말고 슬슬. 손님들이 잔 돌리는 것만 봐도, 저 사람이 평소에 얼마나 와인을 마시는 지 대충 감이 옵니다. 잔 돌리는 것도 나름 내공이 필요하거든요. 그렇다고, 저처럼 무의식적으로 물잔도 돌려서 마시고 그러지는 마세요. 내가 물잔을 돌렸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막 내 인생이 술에 쩔은 것 같고, 막 구제불능같고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