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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기 Oct 19. 2023

다시 돌아가지 못할 순간들

[강아지와 90일 미국 자전거여행] Day64~66

Day64 덩컨-새포드


한국에 돌아가면 귤 먹을 계절이라 좋다. 갈라진 아스팔트 위를 덜컹덜컹 거리며 자전거를 탔다. 오늘도 역시나 거의 다 왔다 싶을 때 아무리 가도 길이 끝나지 않았다. 서부로 갈수록 풍경은 정말 아름다워지는 것 같다. 

 나는 점을 찍는 여행보단 선을 그리는 여행이 좋은데 자전거여행이 딱 그렇다. 점과 점 사이를 온몸으로 관통해 나가는 여행. 또 자전거여행은 속도와 경쟁이라는 가치를 벗어나려는 내 성향과도 닮아서 좋다. 가다가 만난 반가운 자전거 동지

 오늘의 목적지인 새포드에 마침내 도착하여 DQ에 가서 큰맘 먹고 제일 비싼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너무 맛있다… 또 사 먹어야지. 

 연락해 두었던 웜샤워 호스트 제이네 집에 갔더니 오늘 내가 머물 곳인 여기가 아니라며 다른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또 다른 웜샤워 호스트인 ‘할’ 할아버지네 집이었다. 자료조사사회학 교수로 지내다 은퇴하신 80대 할아버지 혼자 사시는 아파트다. 이집트 사람과 결혼하였다가 이혼하고 혼자 사신다고 한다. 혼자 살기 딱 좋아 보이는 집이었다. 부엌, 화장실, 방 하나, 그리고 거실. 내가 사는 집과 비슷한 구성이다.

 오늘 포키와 내가 잘 곳은 거실 소파다. 할은 노년을 혼자 보내며 웜샤워 호스팅 하는 것을 즐기고 계셨다. 내게 독일에서 지냈던 이야기, 유럽 여행 이야기 등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사진을 보여주며 열심히 이야기해 주시는데 죄송스럽게도 오랜만에 대학 강의실에 앉아 있는 것처럼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포키는 이미 떡실신.

좋으신 분임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까 내가 예상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도착하지 않자 걱정이 되셨는지 어젯밤 머문 덩컨 호스트 데보라에게 내가 몇 시에 출발했는지 물어보고는, 데보라에게 덩컨 경찰에 전화해 보라고 한 뒤 자신은 새포드 경찰에 전화해 말했다고 한다. “호키 리를 찾아주세요!”

 아파트 공용 세탁실에 돌려둔 빨래가 다 돌아가기를 기다리다 찾아온 뒤 잘 준비를 했다. 소파가 짧아서 어제 잤던 푹신한 침대 생각이 났다. 


Day65 새포드-바일라스


아침에 할이 차려준 오트밀과 토스트로 아침을 먹고 할과 함께 제이네 집으로 갔다. 내게 좋은 루트를 알려주려 두 분이서 열띤 토론을 하셨다. 할의 어머니는 87세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할도 이제 어느덧 80대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일 것이다. 살 날이 몇 년 남지 않았음을 느끼는 삶은 어떤 것일까. 3개월 여행이 3분의 2가 지나고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이렇게 아쉬운데,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땐 어떤 기분일까. 아쉽지 않기가 어디 쉽겠냐마는, 매 순간을 정성껏 보내자고 다짐해 본다. 할과 헤어지며 기분이 이상했다. 나이 든 사람과의 만남과 영원한 헤어짐. 묘하다.

 요즘 길 위에서의 지난날들이 머릿속에 하나씩 떠오르며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멕시코 음식점에 들어가 음식을 시켰는데 고수가 조금 들어가 있었다. 고수 맛에 조금 너그러워졌나 보다. 아니, 모든 것에 있어 전보다 마음의 공간이 조금 생겼다. 

 하프를 시켰는데도 엄청 많이 나왔다. 고기, 과카몰레, 사워크림, 치즈, 프렌치프라이, 그리고 칩과 살사소스. 너무 좋아서 과식을 했는지 배가 아파서 자전거 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10킬로미터 남짓 히치하이킹을 해서 타를 얻어 타고 왔다. 그냥 지나쳤던 차가 저만치 앞에서 차를 돌려 나를 향해 다가오는 걸 볼 때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곧 배가 나아졌다. 

 여행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마치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듯 하루하루 줄어드는 게 아쉽다. 여행이 곧 끝난다 생각하니 지나치는 풀 하나, 능선 하나, 들꽃 한 송이, 바람 한 결, 햇살 한 줌, 풍경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어느 날 우주의 먼지 같은 여자 하나가 반려견과 함께 정성껏 페달을 밟아 이 길을 지나간 일을, 세상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광활한 들녘에서 같은 바람과 같은 햇살을 맞던 나를 너희들은 기억해 줄까?

 바일라스에 도착해 경찰서를 기웃거리는데 차에 탄 한 남자가 내게 자기 쪽으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잘 데 있어요?”

“아니요, 찾고 있어요.”

“교회에서 자면 돼요. 따라와요.”

 따라가 보니 목사님 집이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내게 선뜻 방을 내어 주셔서 목사님 집에서 하루 신세 지게 되었다.

 저녁으로 견과류와 크랜베리가 올라간 샐러드와 치킨파이, 후식으로는 크림이 올라간 펌킨파이를 주셨다. 땡스기빙데이에 모든 사람들이 펌킨파이를 먹는다고 한다. 


Day66 바일라스-글로브


다음날 아침은 블루베리 팬케이크와 소시지, 커피와 오렌지 주스. 예상치 못한 손님이었던 나를 이렇게 맛있는 음식과 함께 따뜻하게 맞아주신 데비 아주머니에게 감사하다. 

 여행을 할수록 그리워할 순간들만 자꾸 늘어나는데, 그건 좋으면서도 그리움에 마음 시릴 순간들이 많아지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소중한 순간들.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소중하지만, 그래서 더 아프고 시리다.

 나는 그 아름다운 순간들에 분명히 존재했고 그곳을 떠난 지금도 그때를 기억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곳은 언제나처럼 거기 존재할 테지만 나에겐 영영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는지도 모른다. 그곳이 영원히 사라졌다거나 존재한다거나 상관없이 나는 죽을 때까지 그곳에 다신 발 딛는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곳은 존재함과 동시에 사라진 곳이고 그래서 더 머리와 가슴속에 꾹꾹 새겨 두고 싶어지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지 못할 그 순간을 위하여 오늘도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쓴다.

 초반엔 생각보다 수월해 금세 30킬로미터 넘게 달려 주유소에 도착했다. 점심으로 핫도그와 콜라를 사 매점 앞에 쪼그리고 앉아 먹었다. 여기는 아파치 인디언 구역으로 인디언들만 있는 듯 보인다. (아파치 인디언은 미국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 남서부 지역과 멕시코 북부에 걸쳐 살고 있는 인디언 부족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다 내 여행에 대해 물었다. 한 인디언은 그러면서 자랑스럽게 자신은 아파치 인디언이라고 소개했다. 마치 자기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처럼.

 구글 고도표를 보고 오늘 갈 길에 대해 지레 겁을 먹었는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정말 끝도 없는 언덕을 쉬지 않고 올라야 했지만 다행히 페달을 밟아 오를 수 있는 정도였다. 오늘 하루를 표현하자면 오전은 선인장, 오후는 언덕이었다. 정말이지 대단한 오르막이었다. 오늘만큼은 나 자신에게 대단하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정말 길었다. 후. 히치하이킹의 유혹을 뿌리치고 내 힘으로 길고 긴 언덕길을 지나 글로브까지 도착했다. 데어리퀸에서 셰이크를 사 먹고 모텔 몇 군데에 들어가 가격을 물어보고 나왔다. 모텔 6은 78달러, 인도인들이 운영하는 나머지 모텔들은 50달러. 고민하다가 그냥 나왔다. 어둠 속에서 방황하다가 경찰서에 가서 텐트 칠만한 곳을 물어보니 친절한 경찰 아저씨가 경찰서 앞 공원에서 하루 자도 된다고 하셨다. 경찰서 앞이라 마음이 놓인다.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는 법. 달렸고, 보았다. 산을 보았고 선인장을 보았다. 현재의 나로서는 그때의 복잡한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란 어렵다.


'말은 실체를 인간 마음이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축소시킨다.'

-에크하르트 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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