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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기 Oct 19. 2023

여행을 할수록 알게 되는 것은

[강아지와 90일 미국 자전거여행] Day67~70


Day67 글로브-메사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앞바퀴에 펑크가 나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앞바퀴에 가시가 많이 박혀 있다. 튜브를 새것으로 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글로브에 자전거 가게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예비 튜브에서 구멍을 찾아 때우고 갈고 출발하려는데,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돌아보니 한 아주머니다. 


“밥 먹었어요? 땡스기빙데이라 무료로 음식을 나눠주고 있으니 와서 먹고 가요.”

“와 정말요?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스위트 터키(화이트/다크), 크랜베리 소스, 콘, 빵, 버터, 매시트포테이토, 그레이비소스, 음료 그리고 후식으로 펌킨파이와 애플파이.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게 밥을 먹었다. 크랜베리 소스를 고기와 먹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HWY60를 지나야 하는데 갓길이 없거나 좁다고 해서 히치하이킹을 해야 하나 국유림으로 돌아가야 하나 내가 걱정하며 이야기했더니 아주머니가 픽업트럭을 빌려서 수페리어까지 태워다 주셨다. 

 수페리어에서 아파치융티온까지 라이딩 후 잘 곳을 찾지 못해 모텔에 들어가 가격도 물어보고 RV 파크도 가보며 한참 방황을 했다. 그러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조금 더 가다가 들어간 주유소에서 캠핑카 탄 아주머니께 부탁해 조금 더 저렴한 모텔이 있는 메사까지 왔다. 아주머니는 오레곤 주에 사시는데 따뜻한 겨울을 보내기 위해 유마에 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모텔을 잡고 주유소에 가서 아이스티를 사 온 다음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림도 조금 그리고 내일은 어디서 잘지 계속 고민하다가 한 시가 넘어서 잠이 들었다. 



Day 68 메사-피닉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제 문의해 둔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메시지가 와 있어서 예약을 했다. 여유롭게 준비하다가 체크아웃 시간을 넘겼지만 어쨌든 기분 좋게 출발.

 야자수가 늘어서 있고 후덥지근하면서도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내음이 꼭 동남아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어딘가에서 분명 마주했던 공기, 어딘지 모를 그곳에 대한 향수에 젖은 채 자전거를 탔다. 인도 고아 해변일까 아니면 태국 치앙마이? 필리핀? 

 무려 H&M이 있는 도시에 도착한 오늘은 마침 블랙프라이데이다. 일부러 일정을 맞춘 것도 아닌데 어제 도착했었으면 땡스기빙데이라 문을 닫았을 곳에 블랙프라이데이에 오게 되었다. 한 인도인 아저씨가 내 여행에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물어보아서 이야기하다가 아저씨에게 자전거와 포키 좀 잠시 봐달라고 하고 쇼핑을 했다. 빠르게 원피스 몇 벌을 입어본 뒤 하나 구입했다. 평소라면 입지 않을 주황색 바탕에 꽃무늬가 있는 원피스를 샀다. 인도 가족의 딸아이들이 포키에게 물을 주고 싶다며 물을 주었다. 그런 다음 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인앤아웃에 가서 치즈버거 세트를 먹었다. 

 에어비앤비 집을 찾아가다가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웬일로 포키가 밖에서 짖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분명 안이 보이지 않을 텐데.. 기특해라. 

 아무튼 스타벅스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듣고 커피를 마시며 보내는 이 시간. 한국에서 일상적이던 시간을 오랜만에 갖게 되니 참 달콤했다. 메사와 템페. 도시지만 야자수가 있어서 그런지 다른 대도시처럼 싫지 않다. 

 도시에 와 휴일을 맞아 나온 사람들을 구경하며 쇼핑도 하고 도시의 잘 정비된 자전거 길을 달리고 스타벅스에서 일상 같은 시간을 보내니 좋다. 미국 느낌 물씬 난다. 근데 앞으로 LA까지 어떻게 갈지가 막막하다. I10을 타고 가는 수밖에 없는 걸까….

 한없이 침울해졌다가 어쩔 땐 마음이 붕붕 떠 행복하고, 우울하면서도 벅찰 때도 있고, 행복하면서 두려울 때도 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는 결코 행복한 사람이거나 불행한 사람 둘 중 하나일 수가 없다.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그러니까 미래에 있을 행복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순간순간의 행복은 존재할 수 있어도 행복한 사람인 채로 영원할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고, 모두 불행하다. 내가 누구든 어떤 상황에 있든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불행하고 두렵고 불안하고, 다시 행복하고. 그것이 되풀이될 뿐. 때로는 괴로워하고 때로는 기뻐하다가 죽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이렇게 하면 행복할 거야, 저렇게 되면 행복할 거야 같은 생각을 하곤 하지만 어디에나 행복은 존재하고 동시에 불행도 존재한다. 

 에어비앤비 숙소에 도착한 뒤 근처 식당에 가서 저녁을 포장해 와 먹었다. 여행을 할수록 아는 게 많아진다기보다는 모르는 게 많다는 앎이 깊어질 뿐이다. 딱 한 가지 알게 되는 게 있다면, 무수한 삶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조금 다르게 살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괴롭다. 무료하고 공허하고, 그러면서 행복하고, 피곤하다.


Day 69 피닉스


오늘은 피닉스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플리마켓에도 갔다. 점점 살아갈 방법을 터득해 가는 중... 그런 다음 웜샤워 호스트 집에 도착. 가족들이 사는 집은 따로 있고 비어 있는 아파트먼트를 내게 내주어서 커다란 집을 혼자 썼다. 

 집이 다운타운 근처라 피로한 눈 좀 붙이다가 밤에 다시 밖으로 나왔다. 포키와 밤의 피닉스 산책. 도시다. 높은 건물들이 반짝거리는 도시. 도시에서 자연을 그리며 살다가 반대로 자연 속에서 오랫동안 자전거를 탄 뒤 도시에 오니 오랜만에 여행 온 기분이 들었다. 끈적이지도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선선한 밤의 공기. 센트럴 가에는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주말과 연휴를 맞아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 이 분위기 어쩌지. 모두들 즐거워 보였고 나도 덩달아 행복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행복감. 스타벅스 야외 테이블에 앉아 바닐라 라테를 마셨다. 자전거를 아무리 타도 몸이 데워지지 않고 강풍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던 날들과 달리, 밖에 앉아 있어도 춥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는 이 평화로움. 캐럴, 들뜬 사람들. 그리고 포키와 낯선 도시에서의 밤. 행복하다. 

 치폴레에 가서 저녁을 포장해 집에 가서 먹었다. 이곳에서 이틀을 자기로 했다.


Day 70 피닉스


 오늘도 피닉스에서의 하루. 여행이 끝난 것도 아닌데 그동안의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난다. 우리가 거쳐 온 무수한 풍경들. 광활한 평야와 사막, 아무도 없는 대자연. 포키의 눈에 담겼을 풍경이 궁금하다. 포키의 눈에 그리고 기억 속에 담긴 장면들은 과연 어떤 것일까, 상상조차 어렵다. 대견하다, 포키야. 그 바람을, 추위를, 더위를 견디고 이렇게 내 옆에 있는 네가 참 고맙다.

 생각해 보니 앞으로 자전거 탈 날이 열흘 남짓 남았다. 그런데 자꾸 피할 방법만 생각하고 있다. 언덕을 최대한 피할 수 있는 루트, 아니면 히치하이킹으로 어느 구간을 점프한다든가 하는 방법들을. 지금까지 그 숱한 어려움들을 견뎌내며 어떻게 왔는지 의아해질 정도로 지금 나는 많이 약해져 있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힘내서 가야 할 텐데. 그동안 오른 언덕과 거친 바람, 그것들은 다 무어란 말인가. 내가 지나온 길, 아름다운 길, 앞으로 갈 길...

 우울할 땐 그저 그것이 흘러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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